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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 울을 치고 구름으로 발을 친 집, 창의문 밖 도심의 별장형 별서 석파정(石波亭)

[조경명사특강]이재근 교수의 ‘한국의 별서’ 11회
라펜트l기사입력2014-05-16


“한강수(漢江水) 품에 안고 인왕산(仁王山) 등에 메고
계곡가 암반 위에 우뚝 세운 석파정(石坡亭).
조정만(趙正萬)이 소유한 정원 김흥근(金興根) 거쳐 대원군(大院君)으로 넘어갔네.
별서주인 대원군은 사십 넘어 권세 잡아
나라 위해 공도 많으나 쇄국정책(鎖國政策)은 아쉽도다.
옛주인은 바뀌었어도 새주인이 다듬으니 탐방객은 넘쳐나네.”
- 수돈 김우용( 水豚 金雨溶:1952년)의 석파정 (2014) -


서울 석파정 위치도(김영환.2014): 석파정 경관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는 서울의 외원을

진경산수화적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앞의 북한산자락을 따라 백악산과 인왕산이 우뚝 서있고 남산과 한강,
그리고 멀리 청계산과 관악산이 보인다.

석파정(石坡亭)의 역사는 본래 조선 중기의 서예가였던 한수재 조정만(寒水齋 趙正萬:1656-1739)이 만든 소수운련암(巢水雲簾岩)을 조선후기 세도가였던 안동김씨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인수하여 별서로 삼은 데에서 비롯된다. 김흥근의 자(字)는 기향(起鄕), 호(號)는 유관(遊觀)으로, 부친인 김명순(金明淳:1795-1870)이 순조의 장인이었던 김조순(金祖淳)과 4촌지간이어서 일찍이 벼슬에 올라 예조판서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때로는 격하고 방자한 면이 있어 탄핵을 받아 광양으로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김흥근이 석파정을 대원군에게 넘긴 일화는 유명하다. 석파정은 장안에서 경치가 좋기로 이름나 있어서 대원군 이하응(大院君 李昰應: 1820-1898)이 김흥근에게 팔기를 청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대원군이 석파정을 하루 동안 빌려줄 것을 간청하여 아들 고종을 대동하여 다녀갔다. 그런데 고종이 석파정의 자연과 경관에 심취하여 너무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대원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황제가 이리 좋아하시는데, 이 땅을 계속 내놓지 않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냐’고 김흥근을 다그쳤다. 김흥근은 임금이 와서 좋아하고 편히 쉬던 곳을 감히 신하된 도리로 소유할 수 없었고, 결국 석파정을 대원군에 헌납하고 말았다는 얘기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전해져 온다. 대원군은 이후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라 짓고 스스로 이곳의 주인임을 자처하였다.

석파정은 안평대군의 무계정사(武溪精舍)와 그리 멀지 않은 600m거리에 있고 부암정(傅巖亭)과도 불과 1km 떨어진 북악산과 인왕산의 산록이 만나는 계곡부에 위치하고 있다. 석파정의 공간은 크게 진입공간, 사랑채와 사랑마당, 안채와 안채마당, 별채공간, 후원, 심원공간으로 구분 해 볼 수 있다. 정원은 입구 대문에서부터 안채와 사랑채까지 약 50m의 거리를 20m정도의 고도차를 극복하면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석파정도: (김영환.2014): 석파정 내원의 전체모습을 진경산수화기법으로 그렸다.

쇄락한 정원입구 경관을 변모시킨 서울미술관과 너럭바위 아래 있었던 소택지 호수를 표현했고,
석파랑 내로 이전된 별당채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석파정 평면도(정재훈.2005.한국전통조경 p272 재구성)

입구의 대문을 거쳐 위로 올라가다보면 좌측의 암반에 가로 1.85m*세로 0,9m의 장방형 평면에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이라 횡서(橫書)하고 우인정이시(友人定而時) 신축세야(辛丑世也)라고 종서(縱書)한 각자(刻字)가 있다. 글의 제명은 ‘물을 울로 삼고 구름으로 발로 삼는다’는 뜻이며 한수옹 권상하(寒水翁權尙夏:141-1721)가 1721년 벗(友人) 정이(定而) 조정만(趙正萬:1656-1739) 에게 써 주었다. 안채는 지형적으로 높은 경사지 중턱에 위치한다. 안채는 폐쇄형 ㅁ자형으로 서측안팎으로 대문을 달았으며 ㄴ자형으로 꺾어서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각자 및 안채전경(강충세.2014)


계류 쪽에서 본 반송과 사랑채(가을):강충세.2013.

안채와 사랑채사이의 내담에 만든 홍예문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ㅡ자’형 별채가 있다. 홍예문은 높은 석주(石柱)위에 전돌로 쌓은 구조인데 아치형 협문에는 화전(花塼)을 사용하여 아자(亞字)무늬와 학(鶴)을 새겼다. 홍예(虹霓)위에는 상서로운 봉황(鳳凰) 문양이 새겨져 있다. 별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규모에 마루를 깐 형태로 서쪽으로부터 방1칸, 대청2칸, 방2칸, 한단 높은 마루방으로 배치되어 있다. 여기에서 안채지붕 너머를 조망하면 경관이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석파정 전경(): 강충세.2013.


별채쪽에서 본 석파정 외원(가을강충세.2013):가까이엔 안채와 사랑채의 후원멀리는 서울산성과 인왕산 기차바위가 보인다.


사랑채의 평면구성은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동측 전면2칸은 대청, 서측면은 한단 높은 마루방, 나머지는 모두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루방 문을 열면 사랑마당의 운치 있는 반송과 전면에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볼 수 있다. 소나무는 능히 250년은 되었을 성 싶다. 뒤편암반에는 가로 2.6m,세로 0.65m의 장방형으로 삼계동(三溪洞)이라고 쓴 각자가 있다. 그래서 김흥근이 살 당시에는 이곳을 삼계동정사(三溪洞亭舍)라고 불렀다.


삼계동(三界洞각자 바위 쪽에서 본 석파정의 외원(강충세.2009)

멀리 서울산성과 백악산이 보인다.


사랑마당 서쪽의 좁은 공간은 문양을 새긴 전벽(塼壁)으로 쌓은 옛 별당이 있던 터이다. 그러나 지금은 서울 홍지동 125번지 석파랑이란 음식점 안으로 옮겨가 있다.(서울시 유형문화재23호)



석파정의 별당채 (김우용.2014): 본 사진은 본글의 석파정이란 시()를 써준 김우용 시인이 찍었다

본 별당채 건물은 사랑채옆 반송이 있는 곳 위쪽에 있었으나 1958년 서예가 손재형에 의해 석파랑내로 이전되었다.


이 별당채는 10평의 ㄱ자형 건물인데 우측 벽에는 월문창이 있고 ㄱ자로 튀어나온 전면 벽에는 반월문창이 있다. 화문전으로 쌓은 아치형 협문도 이곳에 옮겨져 있는데 모두 정교하게 만들어진 아름다운 구조물이다.

이 사랑마당 남쪽에는 계류와 연못(蓮池), 6각형의 정자가 있었다. 그러나 계류는 암거로 변형되었고, 연못은 매립되었으며, 정자는 불타 없어지고 기둥을 세웠던 흔적만을 확인 할 수 있을 뿐이다. 계류를 따라 올라가면 물이 고이는 연못이 나타나고 그 위에 운치 있는 정자가 서 있는데 중국풍의 석파정(石坡亭)이다. 이곳은 부정형의 석교를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다.


석파정 정자의 원경(가을): 강충세.2013.

이 정자에서는 암반에 고인 물과 서쪽계류의 물이 3m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름이면 급한 경사를 타고 흘러들어와 일으키는 물보라도 감상 할 수가 있다. 정자 우측으로 오르면 상부에 너럭바위가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를 ‘코끼리바위’라고 부른다. 원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코끼리바위와 주변수목들이 물에 고스란히 투영되는 소택지(沼澤池)가 있어서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은 몽땅 메워지고 암반 틈사이로 흘러나온 석간수(石間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직경 1m, 깊이 35cm의 원형수조가 있을 뿐이다.


석파정의 심원과 너럭바위석파정의 깊숙한 심원의 너럭바위 (일명 코끼리바위).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바위아래에는 소택지(小澤池)가 있어서 주변 경치가 물에 투영되는 등 매우 아름다웠다.

석파정은 공간구조상 삼청동에 있는 안동김씨 김조순의 옥호정(玉壺亭)과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계류를 중심으로 정원이 양분되고 있고, 계류축을 중심으로 북쪽에 주거공간이 자리하고 있는 점, 계류를 따라 정원이 전개되면서 끝에는 임천형정원(林泉型庭園)이 조성되는 점이 그러하다.

석파정은 대문, 본채, 석파정 정자, 너럭바위, 그리고 산록을 따라 펼쳐진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동안의 소유권은 대원군 이후 이희(李喜), 이준(李埈), 이우(李堣)등으로 세습되어오다가 6.25직후에는 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후 어찌된 일인지 소유권은 다시 여러 차례 다른 사람 이름으로 바뀌었고 현재는 서울미술관(대표 이주헌)이 소유주다.


석파정 전경(가을): 강충세.2009.

그래도 정원을 좋아하고 예술을 지극히 사랑하는 분이 소유하게 되어 다행인 것이, 먼저 주인은 진입부위의 암반을 깨고 건축하여 사업을 하려고 하였다. 서울 도심의 비싼 사유재산이니만큼 그 넓은 땅을 방치하고 세금만 내라고 하기도 안타깝기는 하지만, 결국 이 사업 시도가 환경단체와 무수히 부딪치며 건물이 올라갔다가 부수고, 새롭게 지어졌다가 철거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입구경관이 너무 파괴되어 어떤 형태로든지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졌었는데, 이때 예술적 안목을 가진 현재의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이후 석파정은 문화시설로의 절차를 밟았고 많은 비용을 들여 미술관이 개관되었다. 우선 혐오스러웠던 입구경관이 개선되었고 석파정 정원도 정비하였다. 현재의 방문객들은 미술관을 보러 가기도 하지만, 석파정이란 정원이 있기 때문에 더욱 미술관엘 간다. 미술관을 관람하고 난 후 상부에 오르면 시원스럽게 트인 옥상정원이 나오고, 본채건물의 고택에서 풍기는 느림의 미학이 마음을 한결 여유롭게 한다. 잘 가꾸어진 정원 외에 주변에 펼쳐진 자연경관은 덤으로 얻는 신선의 경지요, 최고의 예술작품이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엔 푸르른 신록이 눈을 부시게 한다. 가을에는 형형색색의 단풍이 온천지를 물들이고, 겨울에는 정원부지위에 눈이 덮여 백옥같이 깨끗한 설국(雪國)을 연상시키게 한다.


계류에서 너럭바위쪽 심원을 본 모습

삼계동(三溪洞)이라고 쓴 암각 아래 사랑채 앞에 있는 소나무 반송은 기념물적인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나무는 고목이기도 하지만 스토리텔링이 있는 문화의 산실에 위치함으로써 서울시 보호수 차원을 넘어야 한다.


사랑채와 반송

무엇보다도 석파정을 더욱 아름답게 감상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너럭바위 아래에 소택지를 재현해서 물을 가두어두는 작업을 해야 한다. 본채 마당가에는 소 연못을 복구하여 중간 저류조(中間貯留槽) 역할을 하도록 하고 상부에서 하부까지는 수로정비를 해서 계류로서 수경관(水景觀)이 극적으로 연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본채 건너편에 있었던 정자는 육모정(六茅亭)으로 복원해야 하고 탑, 석상 등 환경조형물들은 부지의 성격을 다시 한 번 파악하여 재배치 내지는 이전해야 할 것이다.

석파정(石坡亭)은 서울시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몇 안 되는 조선시대의 별장형 별서이다. 인근의 부암정(傅巖亭)을 경영한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그의 일기에서 ‘어린 시절 화려한 느낌의 석파정을 다녀간 후 그러한 장소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하였다. 얼마나 좋았으면 부암정의 주인조차도 석파정을 가지고 싶다고 했을까?

한때 이 정원의 주인이었던 흥선대원군은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난초도를 그렸고, 때로는 난초를 직접 가꾸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그가 직접 그린 지란도(芝蘭圖)에 새겨 넣은 글씨에도 나타나 있는데,

'與善人居(여선인거) 如入芝蘭之室(여입지란지실)
 : 착한 사람과 지내는 것은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고
 與不善人居(여불선인거) 如入鮑魚之肆(여입포어지사)
 : 나쁜 사람과 지내는 것은 냄새나는 어물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라고 하여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는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하응의 지란도(芝蘭圖):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난초를 좋아해 난초 그림을 잘 그렸고,

직접 난초 키우는 것을 좋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석파정! 석파정은 경관 상으로도 아름답지만,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생활경관이어서 더욱 아름답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재산이 아니라 국민의 재산이요 국민들의 정신적 휴식처이다. 따라서 향후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서 정부차원의 예산투자도 아끼지 말자.석파정은 이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만 남아 있으면 안 되고 성북동의 성락원(城樂園), 부암동의 백석동천(白石洞天)처럼 국가문화재로 승격하여야 한다. 석파정은 삼계동천(三溪洞天) 아래 진정 자연과 철학이 넘쳐나는, 서울에서 몇 남지 않은 대표적인 도시형 별서이기 때문이다.


연재필자 _ 이재근 교수  ·  상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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