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한양의 대표적 도심형 별서 성북동의 성락원(城樂園)

[조경명사특강]이재근 교수의 ‘한국의 별서’ 21회
라펜트l기사입력2014-08-01
십 년 동안 긴 휴가 얻어 북성(北城) 아래 누워있네 
산수풍경(山水風景)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라 마음대로 노니는데
어느 사이 귀밑털이 백발이 다 되었다네.
때로는 한가하게 졸음을 즐기고
술이 있으면 친구 불러 더불어 마시누나.
일만여 아름다운 골짜기엔 구름이 덮이는데
이 내 누대(樓臺)엔 가을달빛이 밝기만 하구나.

- 서파 황수연(西坡 黃壽延: 고종때 문인) 의 와성북동(臥城北洞)-


영벽지쪽에서 본 성락원의 가을풍경(강충세.2010)

성락원(城樂園)은 조선 후기 한양의 대표적 도심형 별서로 철종(1849~1863)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沈相應)의 별서이다. 이곳은 한때 순조(1800~1834)때 황지사의 별장이었으나 심상응이 인수하여 새롭게 정비하였다. 그 후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1877-1955)공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하였다. 1936년 제작된 지도에는 이강공 별저(李堈公 別邸)라고 표기되어있고 주변은 숲과 밭으로 에워싸여 있다. 성락원은 이후 이건공(李鍵公1909-1990), 박용우를 거쳐 심상응의 4대손인 심상준(~1989)의 소유가 되었고 지금은 그의 아들 심호(1948~)가 관리하고 있다.
조선말기 성락원 주변(城北洞)은 성곽의 북쪽외면으로 계곡이 깊고, 수석이 맑음은 물론 도성서 가까워 세도가들이 자주 찾아 휴식하고 수양하던 곳이었다. 또한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1750-1805)가 “복사꽃 안 심으면 수치로 여기는 게 성북동의 풍속이라네.”(最憐城北屯邊俗 不種挑似人爲)라고 했듯이 성북동에는 복숭아밭이 많았다. 그리고 한양에서는 성북동 일대의 도화(挑花), 필운대 행화(杏花), 흥인문 밖 수양버들, 정릉 수석(水石), 도봉 단풍(丹楓)을 한양 춘경의 오색(五色)으로 일컬었다. 이곳에는 자연의 승경(勝景)을 따라 절과 암자가 있었고 정치가와 문사들은 별장을 조성하여 왕래하고 거주하였다. 또한 정계의 분란을 싫어하고 청렴한 생활을 선호하여 현실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선비들이 많았다. 정원을 소유한 이들은 자연에 귀의하여 승경을 즐기고자 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연애호가들이었다.


성락원 위치도


성락원 외원도(김영환. 2014)

성락원의 매력은 자연지형 그대로 건물을 배치하고 계류를 잘 활용했다는 점에 있다. 성락원(城樂園)이란 정원명칭에서도 성 밖 자연의 즐거움을 누리려고 했던 작정자들의 의도를 감지할 수 있다. 성락원은 북한산 아래 구준봉(狗樽峰)을 배경으로 삼고 좌청용 우백호의 두 줄기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뒤의 낙산(洛山)은 주봉의 역할을 하며, 주택이 앉은 자리는 혈(血)이 되어 있고, 각 공간은 기존 자연지형을 이용하기 위하여 몇 개의 단으로 구획되어 있다.

물은 두 줄기의 계류에서 흘러내려 연못을 이루고, 영벽지(影碧池), 쌍류동천(雙流洞天)을 통해 밖의 외수구로 빠지는 현상으로 길지(吉地)임에 틀림없다. 풍수지리적으로 용두가산(龍頭假山)은 바깥의 바람과 시선을 차단하는 목적으로 인공 조성한 것이다. 트인 부분은 이 둔덕의 가산으로 인해 공간의 기복이 넘쳐 나간다고 볼 수 있다.

정원은 크게 진입공간의 전원(前園)과 살림집, 누각, 영벽지의 본원(本園), 송석정, 송석지, 약수터로 이루어진 심원(沈園)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간은 지형을 살리기 위해 노단으로 처리하였으며 아름다운 계곡과 경관을 살리기 위해 곡선 위주의 동선체계를 갖추었다. 연못의 형태도 자연형의 형태를 갖추고 있고 물줄기도 곡선을 그리며 흐른다.


성락원 평면도


성락원 내원도(김영환.2014): 성락원 담장 바깥윗쪽 상지1을 포함하는 성락원 내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처음에 입구에 들어서면 전면 성토된 면 위에 아름드리 엄나무와 단풍, 우측에 소나무가 있고 느티, 다래, 잣나무, 말채나무, 가시나무, 단풍군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울창한 숲을 이룬다. 그러나 요즘은 새로 복원을 하면서 활엽수들이 많이 정리되고 주요 수종이 소나무 위주로 변했다.

쌍류동천(雙流洞天)을 우측으로 바라보면서 다리를 통과하면 인공으로 둔덕을 쌓고 나무를 심은 용두가산의 조산(造山)이 나오면서 본정(本庭)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 용두가산의 축산은 풍수지리에 의해서 선정된 지형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이는 기능적으로는 깊숙한 본원을 진입 공간과 분리시켜 사생활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본원으로 들어서면 성락원에서 살림살이가 가능했던 건물이 보인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義親王:1877-1955)이 기거하던 곳으로 그 앞에는 안마당이 있다. 주인의 접객공간으로 사대부들이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를 담론하고 문화적 교제를 가졌던 장소로 모란과 같은 화초류와 석물들이 놓여있다.


성락원 윗쪽에서 본 영벽지와 살림집 겨울풍경


성락원 바깥 상지1: 성락원은 바깥윗쪽의 이 연못이 수원역할을 함으로써 4계절 물을 흘려보내는 것이 가능하다.

영벽지는 본격적인 정원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계류를 자연스레 암반 위에 고이게 한 물과 돌의 조화가 일품이다. 물줄기가 줄지어 흘러내리는 옆에는 “청산일조(靑山一條)”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장대 같은 고드름이 주룩주룩 매달려 있다는 의미에서 추사가 쓴 “장빙가(檣氷家)”란 글씨에서 겨울철의 느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장빙가 각자의 옆 암벽에는 가로116cm*세로 62cm의 장방형 구간을 평면으로 다듬어서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影碧池 海生 百泉會不流 爲沼碧 蘭頭 自吾得 此水 小作江湖遊 癸卯五月 孫文鶴書”

여기서 영벽지(影碧池)란 세 글자는 초서체로 쓰고 그 다음 오언시는 8행으로 내려쓴 해서체(諧書體)로 썼다. 이 시를 풀이하면 “온갖 샘물을 모아 고이게 하니, 푸른 난간머리에 소(沼)가 되었네. 내가 이 물을 얻은 뒤부터 약간의 강호놀이를 하네.”라는 뜻이다. 계묘(癸卯) 오월(五月) 손문학(孫文鶴)서(書)라 썼는데 이 계묘 5월은 헌종 9년(1843년)으로 추정되며 손문학이라는 사람이 조원에 관여했다는 증표이다. 이 영벽지 각자 위의 바위에는 평평하게 다듬은 가로 115cm, 세로 42cm의 장방형 구간에 또 하나의 한시가 새겨있다. 전서체(篆書體)로 내려쓴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靑山數壘 吾愛吾廬”라는 8행의 시인데, 풀이하자면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샘물은 돌 위에 흐르며, 푸른 산이 몇 겹이 쌓이니 나는 내 농막을 사랑 한다”라는 뜻이다.


영벽지에서 본 성락원의 여름풍경(강충세.2010)


영벽지의 봄

높이 3m쯤 되는 암반 위에서 2단 수직으로 떨어진 물을 인위적으로 판 원형의 수반에서 맴돌아 나가게 한 물이용 기교가 특이하다. 이렇게 폭포처럼 흘러내린 물은 암벽을 몇 개 도는 동안 연지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이러한 유수에 주변 단풍나무가 운치를 더해 준다.

원로를 따라 위로 오르면 보이는 축대 위의 공간에는 몇 개의 석탑과 석등이 놓여있는데, 여기에는 물레방아에 인위적인 기교가 가미되어 성락원에서의 여흥을 거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소폭포와 청산일조(靑山壹條) 암각


성락원 살림집

송석정이 있는 곳은 심원(深園)으로 후원과 같은 곳이다.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로 연지를 만들고 가장자리에 정자를 건축하여 자연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한 공간이다. 계곡을 내려온 물은 “송석(松石)”이라는 암각이 새겨진 바위를 돌아 두 줄기로 못 안에 떨어진다. 지당은 방지의 변형으로 섬은 없으며 못가에 “송석정(松石亭)”이란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원래 11칸 규모였는데 동쪽으로 이전 증축하였고 2003년 다시 개축하였다. 이전할 당시에 120여년 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지을 때부터 나무를 보존하면서 건축을 하였으니, 건물보다도 수목을 우선시했던 작정자의 지혜가 높이 살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누각 속에서 지붕을 뚫고 자라던 소나무는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고사하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비탈진 북쪽 산자락 중앙쯤에는 새로 다듬어 놓은 듯한 “고엽약수터”가 있다. 이 약수는 300년 전부터 솟았다고 하고, 수질도 좋아 철종 때 별감이 나와 지켰으며, 고종과 순종까지 마셨다고 한다.


상지2에서 본 송석정(강충세.2009)

성락원은 원래 6만평 규모의 자연원림 속에 조성되었고, 동쪽 산록에는 약포, 채전, 과수원이 배치되어 있어서 실용정원의 성격을 띠었다. 현재 성락원은 북동쪽 담장 밖에 위치한 연못 300평을 포함하여 4,300여 평이 “국가명승(35호)”으로 지정되었다. 본래의 정원면적에서 상부의 연못까지 문화재구역이 지정 확대된 것은 그곳이 물을 늘 흐르게 할 수 있는 수원(水源)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잘 된 일이다.


영벽지쪽에서 본 성락원의 겨울풍경

성북동에는 지금도 한용운의 심우장(尋牛莊), 이태준의 고택 수연산방(壽硯山房), 전형필의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길상사(吉祥寺) 등 유적이 풍부하고 고급주택들이 많다. 그러나 현재는 어쩔 수 없는 도시화로 자연이 많이 훼손되었다. 그나마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 민가정원인 성락원이고 그 일대이다. 

조선 철종 때 조부가 조성한 정원을 되찾기 위해 후손 심상준은 원양어업 회사인 제남기업(주)을 일으켜 경제적 기반을 세웠고, 정원을 다시 사들여서 자손들과 더불어 잘 가꾸고 관리해왔다. 후손들에 의하면 1989년 심상준 선생은 돌아갈 때 “이 정원을 팔아먹거나 훼손하면 내 자손이 아니다. 이 정원은 선대에서 자연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꾸신 것을 되찾아 관리하던 것이니 만큼 향후에도 잘 가꾸어서 길이 보전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영벽지에서 본 살림집(강충세.2009)


송석정에서 본 상지2의 겨울 풍경

그러나 요즘 공간의 원형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새로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는데, 좀 더 고증을 통한 마무리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송석정은 정자를 수리 복원하면서 소나무가 운명을 달리하여 송석정(松石亭)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되었다. 물이 고갈되어 약수는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새로이 약수터의 수원을 복원하고 주변은 정갈하게 정비하여야 한다. 계류 좌측으로 복원을 위해 흙을 걷어낸 바위 길은 송석정으로 가는 길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송석지 쪽 축대는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에 대해서 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빠른 시일 안에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되어 성락원의 제대로 된 복원이 마무리 되었으면 싶다. 그리하여 이조판서 심상응의 후손 심상준 선생이 유언한 것처럼 그의 후손과 시민들이 좋아하고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제대로 된 도심형 별서로서 면모를 갖추길 기대해본다.

연재필자 _ 이재근 교수  ·  상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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