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일상 속의 Sense and Sensibility

성종상 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라펜트l기사입력2016-08-09

 

일상 속의 Sense and Sensibility


_성종상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


영국의 유명 여류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Sense and Sensibility는 예리한 관찰력과 섬세한 표현력으로 종잡을 수 없는 인간 내면을 실감나게 그려낸 수작이다. 근래에 영화로까지 소개되어 소설에 취향이 없는 이까지도 알고 있는 이가 많다. 원작의 주제이기도 한 제목 Sense and Sensibility는 오스틴의 의도가 이분법적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전자는 ‘이성’ 혹은 ‘분별력’을, 후자는 ‘열정’ 혹은 ‘감수성’ 정도로 해석해 볼 수가 있겠다. 이들은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분별력과 섬세한 감수성에 바탕을 둔 열정이라고 하는, 18세기말 영국 사회에 만연했던 두 유형의 인간성을 대표한다. 흡사 헤르만 헤세가 <지와 사랑>에서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탐색했던 것을 연상시키는 이 소설에서 오스틴이 대조적인 인간군상들의 섬세한 성격 및 심리묘사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결국 열정과 이성, 감성과 분별 사이의 조화 내지는 균형이다. 분별력이 합리적 이성에 기반을 둔 것이기는 하나 그 이면에는 소통불능과 그로 인한 상처로 이어 질 수도 있는 데에 반해, 열정은 자칫 왜곡 내지 맹목에 치우치기 쉽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오스틴이 주목한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의 남녀간 사랑이었지만 우리는 현대 일상 속에서도 이들 상반되는 인간성과 수시로 조우하곤 한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성정 내지 인식을 이루거나 특정 성향 혹은 취향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행동이나 태도로 연결되기도 한다. 깊이 있고 절제된 이성과 풍부하고 섬세한 감성을 한꺼번에 다 갖추기는 사실상 어려운 일이니 대개는 다만 그 둘 어느 쪽 극단에 치우치거나 너무 부족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삶의 환경을 보다 근사하게 창출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조경가로서 필자가 각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감성이다. 감성이란 어떤 상황이나 외부의 자극에 대해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마음의 민감도로 정의할 수 있다. 감성과 유사한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 감수성이란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느끼는 감성의 능력을 말하니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수용적 메카니즘에 주목한 말이다. 보들레르(C.P. Baudelaire)는 어린이와 회복기의 환자, 그리고 예술가를 감수성이 뛰어난 이들로 간주했다. 그는 이들이 "사물의 아주 사소하게 보이는 것까지도 생생하게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모든 것을 남달리 받아들인다고 했다. 사실 똑같은 것을 남다르게 감지해내고 표현해내는 능력은 조경가에게 중요한 요건이자 자질이다. 특별히 자연을 주소재로 다루는 조경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연에의 감수성, 즉 자연과의 세심한 교감능력이다. 감성이나 감수성은 타고난 천성이나 기질만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 습득되는 하나의 ‘능력’으로 간주된다. 사물에 대한 체험이 오관을 통해서 감각적으로 수용됨으로써 형성, 배양되는 것이다. 즉, 평소 관심을 갖고 자주 접하거나 몸소 체험해 봄으로써 감각을 키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상 속에서 감각을 키워낼 수 있도록 감성이나 감수성을 자극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도시들은 여전히 과잉 정보와 자극으로 몸살을 겪는 중이다. 좁은 국토에 과밀한 인구가 모여 살다보니 본의 아니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자극을 주고받고 있는 중인 것이다. 정보와 자극의 양태는 자못 다양하다. 최근에는 많이 정리되는 중이기는 하지만 거리에는 광고와 간판이 넘쳐난다. 간판이나 광고 같은 것들이 시각에 의존하는 것들이라면, 안내 방송이나 차량 소음 같은 청각에 관련된다. 음식이나 오염물에서 나오는 냄새 같은 후각적 자극도 많다. 최근 들어 부쩍 잦아져 국가적 관심사로 부각된 미세먼지나, 종종 주민간의 분쟁으로 언론에 등장하는 아파트 층간 소음 같은 환경차원의 문제도 있다. 조명을 넘어서 공해가 되어 버린 빛, 소통을 불가하게 하는 소음은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다. 과잉 자극은 우리의 감각을 둔하게 하고 심성도 해치기 마련이다. 일례로 시끄러운 곳에서 식사를 하게 되면 조용한 곳에서 보다  70%나 더 먹게 된다고 한다. 시끄러운 곳에서는 식사 속도가 빨라지기 쉬운데 그럴 경우 미처 포만감을 느끼기 전에 많은 식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포만감을 감지하는 데에 소음이 장애가 되어 자기도 모르게 과식하게 되기 쉽다. 이를 정보와 자극이 넘쳐나는 우리 네 환경에 대입시켜보면 우리들의 감각도 많이 둔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시끄럽고 번잡하기만 한 도시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들뜨게 되기 쉬우며 머리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쉽게 흥분되며 어쩔 수 없이 잡스러워 지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속내 깊은 사유를 아예 생성불가하게 하는 온갖 자극과 정보는 우리들을 잡스럽다 못해 아예 좀스럽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단단한 바위도 흐르는 물과 오래 접촉하면서 홈을 만들어낸다. 모질고 힘든 현실에서도 감수성은 깃들 수 있다. 다만 우리가 미처 마음을 주고 들여다보지를 못하고 있을 뿐. Ⓒ성종상 한탄강. 2012년 9월

우리 도시들이 인간의 감수성을 키워주기는커녕 마구 짓뭉개는 거대한 폭력적 시스템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염려가 있다. 회색화된 도시 속에서 기계화된 일상의 부품처럼 아무 일 없듯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수성의 회복이다. 감수성은 연약함이나 유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수성은 대상이나 상황을 선명하고 섬세하게 감지해 냄으로써 사려 깊은 사고와 분별력 있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원천이 된다. 인간 사회에서 그것은 곧 타인에의 배려와 공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일찍이 송대의 대유학자 정호(程顥, 1032년~1085년)는 타인의 아픔에 대한 관심과 공감이 없는 세태를 불인(不仁)이라 하며 감수성 결핍을 지적한 바 있다. 한의학에서 불인은 마비되어 기혈이 통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다른 이의 아픔이나 속사정을 도외시하고 공감하지 않는 것은 곧 몸에 기혈이 통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에는 ‘기혈이 통하면 병이 없고 불통하면 병이 된다’고 했으니 우리 사회는 지금 병이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산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한국대표숲’ 참나무림. Ⓒ성종상 관악산. 2009년 2월

선유도공원 방문자센터 바로 뒤에는 포플러나무가 3줄로 열식된 곳이 있다. 이전에 선유도정수장이었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건물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hommage)로서, ‘살아 있는 나무 건물’로 간주하고 설계한 곳이다. 열식된 포플러 아래에는 나무 벤치가 놓여 있는데 필자는 선유도공원을 방문할 때마다 그 자리를 찾곤 한다. 잠시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조용히 있노라면 머리 위에서 수많은 포플러 잎사귀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유달리 도톰한 포플러 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서로 부딪쳐 사그랑사그랑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 소리는 세상속 소음과는 사뭇 다르다. 가만히 집중해서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머리가 맑아지고 차분해진다. 명상음악이 따로 필요 없는 셈이다. 필자는 이를 ‘무자극적 순수자연음향’이라고 부르고 싶다. 분분 세상속의 소음과 다른, 이런 류의 ‘무자극적 순수 자연음향’을 일상 환경 속에서 많이 접하고 감지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상 속 가까이에 이런 류의 명상적 환경을 많이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극 과잉의 시대에 조경가들에게 주어진 유효하면서도 ‘약발’ 있는 임무이자 특권이 아닐까 한다.


선유도공원 ‘포플러 나무건물’ 아래에서 쉬는 시민들. Ⓒ성종상 2004년 8월 

글·사진_성종상 교수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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