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지식 홍수 속에서 잘 배워서 잘 써먹기

성종상 논설위원(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원장)
라펜트l기사입력2018-08-16

 

지식 홍수 속에서 잘 배워서 잘 써먹기 



_성종상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




수년 전 좋아하는 한 시인을 모셔서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자연이 말하는 것을 받아쓰다’라는 제목이었는데 탁월한 감수성으로 자연과 접하며 교감해낸 것들을 쉽고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시골에서 살면서 주위 자연과 조우하는 순간들을 시인 특유의 감각으로 포착해 내어 시어로 풀어낸 그이의 시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고 있는 듯하다. 필자가 그의 시를 좋아하는 까닭 역시 단지 그가 사는 곳이 필자 고향과도 멀지 않은 섬진강 근처여서만은 아니다. 강연 중에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자신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였다. 초등학교도 못 다녀서 글자조차 읽지 못하는 어머니가 일상 삶 속에서 하는 말씀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꾀꼬리가 울기 시작할 때에 참깨를 심고, 보리타작하는 도리깨 소리 들으며 토란을 심는다는 식이다. 소쩍새 울음소리로 그 해 농사를 예측하고, 하얗게 뒤집히는 참나무 잎을 보며 비가 올 것을 예견한다고도 했다. 그는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쓰면 그대로 시가 되었다’고 말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자연의 언어를 절로 몸에 익힌 탓에 자연 현상이 그대로 일상과 깊이 연계되어 있다.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자연현상과의 관계 인식과 비유는 그 자체로 시가 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삶을 지탱시켜주는 지혜가 된다. 말 그대로 자연이 교과서인 셈이다. 그런 이가 어디 시인의 어머니만일까? 글을 배워본 적도, 교문 안에 들어서 본 적도 없는, 한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어머니들의 삶은 분명 지금 우리들의 삶과 다른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 세대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문명화된 사회에서 나고 자랐다고 해서 우리가 더 잘 났다거나 우리 삶이 진일보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찍이 지적 오만과 그로 인한 과오를 지적했던 홉스는 “어떤 평범한 이라도 자신의 생업에 관한한 그 어떤 지식인이나 권력자보다 더 현명하다”고 설파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자연에의 의존도가 큰 농사를 제대로 짓기 위해서라도 농부는 자연현상을 세심하게 읽어낼 수 있는 능력과 경험을 키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왜 배워야 하는가?

황금빛 깃털에다 소리까지 고운 꾀꼬리는 예로부터 우리 삶 속에 친근한 새였다. 문인들의 시문이나 그림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일반 서민들의 삶에도 깊숙이 연관되어 있는 새가 꾀꼬리이다. Ⓒ나무위키

김홍도 마상청앵도

사람은 2-3천 개 정도의 사물만 인식하면 일상을 살아가기에 별 무리가 없다고 한다. 현대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수도 비슷한 수준이라고 하니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량이 의외로 많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몇 안 되는 사물과 단어만 알아도 살 수 있다니 참으로 편하고 여유로운 삶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힘들여 더 배우려 애쓰는 것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일 것이다. 어릴 적부터 어른들은 더 나은 삶을 찾는 데에는 공부가 제일 쉬운 길이라면서 면학을 강조하곤 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을 흔히 듣던 당시에는 틀린 말도 아니었다.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대학에 진학해서 교양을 배우고 전문 지식을 익히려 애쓴다. 그리하여 좋은 직장을 얻어 경력을 쌓으면서 전문가로 성장하고 더 높은 지위로 오르려고 노력한다.


인도의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fliker

영어 ‘study’는 일본어로는 ‘벤코오스루(勉強する)’이고, 중국어로는 ‘니엔수(念書)’이다. 각각 ‘일부러 힘쓰다’라는 뜻과 ‘책을 읽다’라는 뜻이다. 그에 상응하는 한국어는 ‘공부(工夫)하다’인데 그 출발지점을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주희는 ‘공부’라는 용어를 수차례 반복하여 사용하면서 유자(儒者)들의 수양을 강조하였다. 이 때 공부는 몸의 단련을 통해 어떤 것(경지)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말하는 공부는 ‘수신(修身)’ 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가 있겠다. 배운 바를 체화, 곧 몸에 익혀서 실제로 뭔가로 이루는 것이 올바른 공부이고 배움인 셈이다. 배움의 참된 의미 안에 행동이 담보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지식을 몸에 익혀서 결국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실제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 20세기의 영적 스승으로 불리는 인도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1895-1986)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은 배움이 아니라고 설파했다.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목적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도 배움 혹은 지식의 실천성을 강조했다. 결국 배움이란 ‘지식의 습득 → 사고의 전환 → 실천’에 이르는 만만치 않는 지적 여정을 포함한다고 정의할 수가 있다. 그 안에는 지식의 취사선택, 그것의 인식 및 자기화, 몸을 통한 적용으로서 실천이라는 지적 심화과정이 담겨 있다. 여기서 올바른 선택과 판단, 그리고 실천을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바로미터는 비판적 사고와 자기성찰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와 지식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문분야가 세분화되고 문화도 다양해진 만큼 정보와 지식의 총량도 폭증하고 있다. 오늘날 하루에 생산되는 데이터의 총량이 과거 5천 년간 만들어진 것보다 더 많고, 100년 전에 한 사람이 평생 접할만한 정보량을 오늘날 우리는 단 하루에 접하고 있다고 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손에 잡기 시작한 핸드폰을 잠자리에까지 놓지 않으면서 무수한 정보를 검색하고 살핀다. 하지만 그렇게 접하는 무수한 정보들로 인해 과연 우리 삶이 얼마나 개선되는 지에 관해서 특별히 알려진 바는 없다. 인생 백세 시대에 돌입했다지만 한 인간이 평생 동안 접하는 업무 영역이나 경험 세계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면 현대 사회는 정보와 지식 과잉 상태인 확실해 보인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정보와 지식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그 많은 정보들이 과연 내 삶에 얼마나 필요한 지, 아니 필수불가결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보기에 따라서는 단 한순간이라도 뭔가를 보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과잉정보자극갈증’의 현상으로 의심되기도 한다. 잠시라도 정보가 없으면 참기 어려운 조바심의 발로라고도 보인다. 그렇게 쉼 없이 눈과 귀로 정보를 접하다 보니 우리 뇌도 쉴 틈이 없다. 그만큼 생각도 키우기 어렵고 옳은 판단을 기르기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집단 사고(group think)’라는 말은 미국의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Irving Janis, 1918~1990)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집단이 다른 생각을 용인하지 않은 채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려는 성향을 지적하면서 제시한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정보와 지식의 홍수 속에서 위에서 말한 ‘취사선택-인식 및 자기화-실천’에 이르기는 좀 어려운 게 아니다. 근 한 달째 푹푹 찌는 폭염 속에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머리로는 더욱 헷갈리기만 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한 번뿐인 내 삶,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정신 빠짝 차리고 끊임없이 자문해 봐야지 않겠는가 말이다. 혹시라도 내 판단이나 결정이 집단 사고의 어리석음에 빠지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정작 내게 무슨 의미가 있고 보탬이 되는지를.
글_성종상 교수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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