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이론의 정초

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기사입력2023-02-08
이론의 정초


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우리는 이론이 죽은 시대에 조경을 하고 있다. 그런 시대에 우리는 이론을 어떻게 정초해야 하는가? 

개념을 통해 나의 설계를 이야기해야 한다. 

첫 번째 자문. 왜 내가 나의 설계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친구와 대화 할 때 나의 일을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꼭 친구가 내 일을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다. 하지만 조경계, 더 확장하자면 건축계와 예술계에서는 내가 나를 설명한다는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내 설계를 남이 이야기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공인된 형식이다. 이를 비평이라고 부른다. 비평가라고 불리는 이야기꾼들은 대개 스스로 작품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남의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고흐가 아무리 자기 작품의 가치를 설명해도 아무도 그의 작품을 이야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고흐는 끝내 예술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작가가 작품의 담론을 주도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담론을 만들어내는 이들은 작가를 선별적으로 선택하여 평가하는 비평가들이다. 비평의 담론 체계와 논리가 곧 이론이었다.

이 지점에서 불합리함을 느낄 것이다. 나의 작업을 내가 이야기하면 안 되고, 남이 이야기를 해야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다니, 이게 정당한 것인가? 타푸리는 이상한 이론과 실무의 괴리를 지적했고, 작품이 곧 비평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즉, 모든 의미 있는 설계는 이전의 경향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실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의 비평이라는 것이다. 타푸리는 이론의 권력을 다시 작가에게 돌려주는 이론을 제시한 셈이다. 타푸리 덕택에 건축가와 조경가는 이제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이론을 만들 권리를 갖게 되었다. 한편으로 건축가와 조경가는 실무 외에 이론을 생산해야 하는 숙제도 안게 되었고, 이는 1980년대 이후 건축과 조경에 철학적 개념이 난무하고 건축과 조경이 어려워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제 건축가와 조경가가 스스로의 작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 조경가들은 너무 조용하다. 인스타에 사진은 계속 올라오는데 생각의 자취는 찾기가 어렵다. 이미지는 넘쳐흐르는데 설명은 듣기가 어렵다. 그러나 나는 우리 조경에 사유가 부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 환경과 조경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라는 연재를 통해 수많은 생각이 존재하고 이론의 잠재적 씨앗들을 저마다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창구가 사라진 순간 다시 침묵하는 이미지만이 넘쳐흐른다. 
 
스튜디오 101의 김현민 소장은 블로그를 운영한다. 블로그에는 그의 설계적 사유의 흔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2004년 그가 쓴 인터페이스 랜드스케이프 디자인이라는 텍스트는 여전히 그의 블로그에 남아있다. 이 텍스트로 인해 그가 만든 이미지와 공간들은 사유의 생산물이 되며. 그의 설계는 다시 사유를 생산할 수있는 힘을 갖는다. HLD는 블로그를 운영한다. 이 블로그에는 HLD 모든 구성원들의 생각과 고민이 올라온다. 프로젝트에 대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각각의 텍스트에 담긴 개별적 사유는 저마다의 조경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하등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생각의 파편들은 HLD라는 집단의 설계를 규정하는 새로운 하나의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얼마 전 더 가든의 김봉찬 대표가 강의를 하고 싶다는 요청을 해오셨다. 본인의 조경 철학을 다른 실무자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하셨다. 앞으로 매번 다른 설계사와 학교를 오가며 기회가 될 때마다 본인의 생각을 나누고 싶다고 하셨다. 생각의 공유는 일방적인 지식의 전달과 다르다. 생각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생각은 나에 속한 것이 아니라 모두의 자산이 된다. 담론이 된다. 

이제 내가 나의 설계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이론의 시작이다. 


STUDIO 101의 인터페이스 랜드스케이프


두 번째 자문. 왜 개념을 통해 이야기해야 하는가?      
설계에 대한 이야기가 곧 설계 이론이 되지는 않는다. 이론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지점이 여기이다. 담화와 이론이 같다는 오해. 예전에 한 교수님이 한국 현대 조경의 이론을 작가론을 중심으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경가들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끝내 교수님은 작가론에 관한 책을 내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담화만 있고 이론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더라”가 대답이었다. 조경 설계를 하는 모든 이들은 자신의 설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면서, 직원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친구에게 넋두리를 하면서 자신이 한 설계를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런 일상적인 설계 업무에 대한 대화는 이론의 형태로 응집되지 못하고 일상성의 연기 속으로 흩어져버린다. 설계에 대한 이야기가 이론이 되기 위해서는 특이성을 형성하는 누빔점이 필요하다. 개념이 그 누빔점이다. 
     
국어사전에 적힌 개념의 규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개념은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뽑아내어 종합하여서 얻은 보편적 관념으로써, 언어로 표현되며 판단을 성립시킨다. 개념을 언어의 형태로 표현 것을 개념어라고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개념어를 사용하면 불편함을 느낀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은 대부분은 엄밀히 규정되어 있지 않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이해된다. 개념어는 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없애고 엄밀한 관념을 지시한다. 그래서 개념어는 불편하며 환원적이며 자기부정적 언어이다. 관념들의 원석에서 모순되거나 불필요한 관념들을 제거하고 다듬다보면 개념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개념은 오히려 위태롭다. 모호함이 없어졌기 때문에 활용의 폭이 줄어들며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러나 개념화의 불편한 과정을 거쳐야만 사유는 특이성을 지니게 된다. 내가 하는 생각이 남들도 다 하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굳이 애써 말할 이유가 없다. 나의 생각이 다른 이들의 생각과 다른 지점이 생길 때 비로소 사유는 시작된다. 당신의 조경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조경은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와 환경을 보존하고 만드는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이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조경헌장의 관념일 뿐이다. 더군다나 저 말에는 너무나 많은 해석의 여지가 있어 하나마나한 대답이 되어버리고 만다. 누군가 “조경은 드로잉을 통해서만 존재한다”라고 말한다면 매우 강한 특이성을 만들어낸다. 반면, 이 말은 위태롭다.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약한 공격에도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개념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들 생각과 다르지만, 남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개념을 제시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그래서 이론가들은 일종의 지름길을 찾아놓았다. 개념을 빌려오는 것이다. 난해하게만 들리는 현대 건축과 조경의 이론서를 가득 채운 개념어에는 비밀이 있다. 사실 이들은 원래 건축과 조경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건축과 조경의 개념어들은 철학, 미학, 사회학 등의 다른 분야에서 빌려온 말이다. 개념을 빌려온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를 차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개념을 만든 사유의 과정과 논리를 통째로 가져오는 것이다. 개념은 빌려오면 개념의 논리를 스스로 만드는 수고를 더는 장점 외에 더 큰 이득이 있다. 빌려온 개념을 통해 정립된 나의 조경은 그 개념이 만들어진 분야로 확장될 가능성을 갖게 된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빌려온 “장소성”의 개념은 나의 조경과 하이데거의 세계관을 이어준다. “해체”라는 개념을 통해 나의 조경은 데리다적 문학 해석과 접점을 갖게 되며 “욕망”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 나의 조경은 정신분석학적인 함의를 담게 된다. 개념을 공유하는 이론을 통해 조경은 사회학과, 인류학과, 철학과 소통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지름길에는 위험요소가 숨어있다. 철학과 조경은 엄연히 다른 분야이다. 한 분야의 개념이 매끄럽게 다른 분야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정교한 변형과 또 다른 방식의 사유가 필요하다. 철학적 개념을 섣부르게 조경에 도입할 때 당연히 불협화음이 발생하며 그 모든 노력이 무의미한 말장난으로 끝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개념의 차용은 유용한 방편이지만 동시에 반성의 거울을 제공한다. 개념은 나의 사유가 아집에 빠지지 않고 협의 개념을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울이 된다.

나의 설계를 말한다는 것은 의지의 문제이다.
개념을 세운다는 것은 이성의 문제이다. 
이론을 정초한다는 것은 의지와 이성의 문제이다.



HLD의 블로그에 담긴 텍스트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다른기사 보기
ymkim@uos.ac.kr

네티즌 공감 (0)

의견쓰기

인포21C 제휴정보

  • 입찰
  • 낙찰
  • 특별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