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노벨상을 받은 정원사를 아십니까?

김태경 논설위원(강릉원주대 교수)
라펜트l김태경 교수l기사입력2018-05-27
노벨상을 받은 정원사를 아십니까?



_김태경(강릉원주대 교수)

 

그것은 정원을 가꾸는 가운데 느끼는 창조의 기쁨이며 창조자의 우월감이기도 하다. 한 줌의 흙을 자기 생각과 의지에 따라 형상화할 수 있으며, 여름을 위해서 좋아하는 열매들이나 아끼는 색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향기들을 창조할 수 있다. 작은 화단, 몇 평 안되는 벌거벗은 땅을 미소짓는 색채의 물결로 바꿔놓는 것이다. -<즐거운 정원> 중에서-
작년이 탄생 140주년, 몬타뇰라에서 뇌출혈로 사망한 지는 56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조경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옴스테드와는 20여년 정도의 중첩된 삶의 시간을 갖는다. 독일의 칼프에서 태어나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노벨상과의 인연은 72년이 흘렀고 독일 출신에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해서 그랬는지 같은 해에 괴테상까지 수상했다.

“이 4살의 아이는 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지력과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어머니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의 가능성은 걸음을 떼면서부터 돋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울브론 신학교에서의 생활은 그렇지 않아 자살기도를 하는 등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15세에는 퇴학을 당하게 된다. 어머니가 감지했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첫 경력이 위태로움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2년 후인 17세에는 시계공장의 견습공 생활을 하였으나 이것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만 둔 것으로 보아 학교에서는 왕따, 사회에서는 부적응자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을 갖게 한다. 당시의 부모님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부모님들이었다면, “저거 사람구실이나 할 수 있을까?” 이러지 않았을까? 그러나 20세가 되면서 얻은 튀빙겐서점의 일자리는 비록 점원이기는 하였으나 그의 인생에 큰 전환기를 마련해준다. 27세에 마리아 베르누이와 맺었던 백년가약을 54세에 이르는 시간 동안 2번을 더하게 되니 그의 결혼생활이 어땠는지는 세세히 모르지만 어머니도 감당하지 못했던 그의 의지를 부인들인들 감당할 수 있었을까하는 오해를 해본다.

부친의 사망과 부인의 정신분열증 그리고 막내아들의 입원 등은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던 그도 감내할 수 없었던지 정신치료를 받게 된다. 이때 그의 치료를 맡았던 사람이 훗날 정신분석학의 대부가 되는 칼 구스타프 융이었다고 한다. 닷새 뒤 자신의 한 작품 속에 등장할 인물들이 꿈에 나타났다고 하니 융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주인공인 소년 싱클레어가 자기자신을 자각해 가는 과정을 그려 ‘에밀 싱클레어의 청년시절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작품으로 1919년에 간행된다. 이쯤되면 이글의 주인공은 문학가임에 드러났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40세 즈음에 시작된 자신의 정신치료 과정에서 시작한 그림그리기는 그에게 ‘화가’라는 경력을 덧붙이게 된다. 1920년에 시작한 전시회가 파리, 마드리드, 뉴욕, 샌프란시스코, 도쿄, 삿포로, 몬트리올, 함부르크 등지에서 이어졌으며, 2015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열렸으니 화가라고 했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테고, 생을 마감하기 1주일 전까지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 화가가 마지막 직업이 아닌가 한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즉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종종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발견했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는 중요치 않다. 내게 있어 그것은 문학이 내게 주지 못했던 예술의 위안 속에 새롭게 침잠하는 것이다.
-Felix Braun에게 보내는 편지(1917) 중에서-
시들어버려 소리없이 떨어지는 장미와 튕겨오르는 가지, 황금빛 거미가 거미줄에서 매달린 채 나무에서 살금살금 떨어져 내리는 모습, 정원테라스 위에 몇 송이의 꽃들이 마지막 저녁 빛의 소매를 붙잡고 있는 정취, 밤나방의 날갯짓 등이 그냥 넘길 수 없는 찰나였고, 그에게는 꼭붙잡아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그림은 정원에서 보고 만지고 느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음에서 점차 정원사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갑작스러운 소유욕에 사로잡혀 휴식도 잊는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부지런을 떤다. 연필과 펜, 붓과 물감을 들고 화려하게 피었다 사라지는 것들의 풍요로움을 내 곁에 남기고자 애쓴다. 정원의 계단 위에 서린 아침 그늘을 공들여 스케치하고, 굵은 참등나무의 뱀처럼 뒤얽힌 덩굴과 멀리 저녁 산들 위에 감도는 유리 빛깔 같은 색채를 베끼려 애쓴다. 그것들은 가는 숨결처럼,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그의 정원인식은 소유에 따른 만족은 아니었다. 한동안 살았던 베른 교외의 집에는 멋진 정원이 있었음에도 이것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었는데, 이곳에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어 아마도 이 정원에서는 자신이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원일은 하지 않았어도 그의 소설 <꿈의 집>에서 이 정원을 묘사하고는 있지만 아쉽게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물론 타의적으로 정원일을 멈췄을 때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시대를 비판하는 저널리즘과 전쟁포로에 대한 보살핌으로 정원에서의 일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게 된다. 한시적이나마 그의 문학에서도 ‘정원’이 사라지게 되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그를 히틀러의 광란시대를 뛰어넘는 평화주의자로 기억의 또 한자리를 매김하게 된다.

전쟁의 유일한 효용은 바로 사랑은 증오보다, 이해는 분노보다, 평화는 전쟁보다 훨씬 고귀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뿐이다.
1931년은 그가 다시 정원의 품으로 돌아가는 시기로 이때부터 1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원일을 마친 저녁시간이 되면 그의 손에는 항상 유리구슬이 쥐어지게 된다. 정원으로 돌아간 그는 이른 아침부터 오전시간은 땅을 가꾸는 육체활동에, 오후와 저녁시간은 글쓰기라는 정신활동에 배분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50대가 되니 정원을 통해 하늘의 뜻을 알게(知天命) 되었던 것은 아닐까? 저녁때마다 손에 쥐고 있던 그것은 <유리알 유희>라는 제목으로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게 된다. 정원이 주제는 아니었지만 정원의 생활이 원동력이 되었던 대작이었다. 물론 정원이 주제였던 작품도 있어 1935년에 7월 한 달간 고대의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했던 6운각으로 쓴 <정원에서 보낸 시간>은 60회 생일을 맞은 그의 누이를 위한 것이었다.

‘헤르만 헤세’

삶을 마감했던 몬타뇰라의 정원, 많은 종류의 꽃과 나무가 그 안을 채우고 있었지만 그 중심은 항상 포도밭이었다. 한 해에 700㎏ 정도를 수확했던 포도를 주요 수입원으로 한 것으로 보아 실용원이었던 모양이다. 그리 정확한 셈은 아니지만 지금의 동네마트 가격으로 계산해보니 200만원 정도(??)... 조금은 씁쓸하다. 어쨌든 이 거장에게 있어 정원은 늘 삶의 중심이었다. 아! ‘에밀 싱클레어의 청년시절의 이야기’라는 부제의 소설은 어쩌면 우리에겐 노벨상 수상작보다 더 먼저 만나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원제는 <데미안>이다.

정원에서의 헤르만 헤세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이것은 다음 번에 계속하려 한다.
_ 김태경 교수  ·  강릉원주대학교 환경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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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kkim@gw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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