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생태문화] 잉카의 중심에서 잉카를 노래함

남미생태문화 탐방, 세상에 없는 경험, 우연히 발견한 즐거움 - 23
라펜트l박미옥 교수l기사입력2017-05-07
Human Nature & Culture 남미생태문화 탐방기
세상에 없는 경험, 우연히 발견한 즐거움 - 23

잉카의 중심에서 잉카를 노래함...

탐보마차이, 푸카푸카라요새, 켄코




글·사진_박미옥 오피니언리더

나사렛대학교 교수




삭사이와만, 탐보마차이, 푸카푸카라, 켄코

잉카의 매력은 여전한 신비로움에 있다. 제법 많은 정보들이 노출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왠지 잉카는 그냥 전설이나 신화처럼 여기고 싶어 한다. 유럽인들에게 처절하게 당했던 그들만의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티티카카에서 쿠스코를 거쳐 가면서 우리 일행들은 잉카의 신비로움을 하나씩 몸소 체험하면서 또 다른 신비로움을 향해 가고 있다.

티티카카호와 푸노에서 고산증에 시달렸던 우리 일행은 잉카의 배꼽 쿠스코로 내려오면서 다시 활기를 찾았다. 쿠스코는 안데스 산지 중간의 해발 약3천5백m 내외의 고원지대이다. 쿠스코가 잉카의 상징동물인 퓨마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는데, 그중에서 샥사이와만은 쿠스코 분지의 북쪽 산악지대에 분포하며 퓨마의 머리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산악지대에는 켄코, 탐보마차이, 푸카푸카라 등의 요새와 종교적 상징물들이 분포한다.

샥사이와만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며, 이번 글에서는 신비의 왕국 잉카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 후, 탐보마차이와 푸카푸카라, 켄코 등을 소개한다.


철새는 날아가고(El Condor Pasa), 잉카이야기...
I'd rather be a sparrow than a snail. 달팽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참새가 되겠어요. 
Yes, I would. 네, 그럴 거예요.
If I could, 만약 그럴 수 있다면,
I surely would. 꼭 그렇게 할 거에요.
I'd rather be a hammer than a nail. 못이 되기보다는 망치가 되고 싶어요.
Yes I would. 네, 그럴 거예요.
If I only could,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I surely would. 꼭 그렇게 할 거예요.

누구나 한번쯤은 흥얼거렸을 법한 유명한 Simon & Garfunkel의 노래 ‘철새는 날아가고 (El Condor Pasa)’이다. 가사는 좀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잉카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노래에 나오는 콘도르는 잉카의 상징으로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라는 의미를 지니며, 잉카의 영웅들이 죽으면 콘도르 새로 부활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노래 가사 역시 원래는 ‘오 하늘의 주인, 전능한 콘도르여’로 시작되며, ‘내가 태어난 곳, 잉카 형제들이 있는 고향 안데스’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이 노래의 배경에는 1780년 페루의 대규모 농민봉기의 중심인물인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José Gabriel Condorcanqui Noguera)’의 이야기를 테마로 한다. 1913년 페루 작곡가 다니엘 알로미아 로블레스가 원주민들의 전승으로 내려오던 노래를 채록하여 오페레타 ‘콘도르칸키’의 주제음악으로 연주한 것을 1970년 폴 사이몬이 번안하여 사이몬과 가펑클이 부른 노래이다.

우리에게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 그리고 수많은 해방 영웅들이 있다면 남미에는 콘도르칸키가 있다. 그는 끝내 해방을 완수하지 못하고 1781년 처형당하지만 이후 라틴아메리카 해방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잉카의 후예들은 그가 죽어서 콘도르가 되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의 해방운동과 저항정신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잉카의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Thupaq Amaru)로 이어진다. 스페인의 침공을 받아 1533년 황제 아타왈파(Atahualpa)가 피사로에게 살해당한 후 잉카인들은 아마존 유역 빌카밤바를 근거지로 40년간 저항하다가 1572년 투팍 아마루가 잡혀서 처형당하면서 결국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아마루 2세(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 초상이 새겨진 지폐

그로부터 200년 후 18세기 후반 1780년, ‘금을 숭배하는 약탈자’ 스페인을 몰아내고 잉카를 부흥하자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콘도르칸키에 의해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잉카의 후예로서 스페인 정부로부터 교육을 포함한 일정한 특혜까지 받았지만 착취당하는 동족들과 함께 부흥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스스로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의 후손이라 자처하여 투팍 아마루 2세로 명명하고 잉카황제 복장을 하고 지휘를 하였다. 비록 그의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온몸이 찢기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그의 혁명정신은 남미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그들이 회복하고자 꿈꿨던 잉카는 어떤 나라인가?

잉카는 크게 쿠스코왕국 시기(Kingdom of Cusco; 1200-1438)와 잉카제국 시기(Inca Empire; 1438-1533) 및 빌카밤바 망명정부 시기(1533-1572)로 나눌 수 있다. 그 이전 900~1200년 시기에 킬케문명이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1197년 망코 카팍(Manco capac)에 의해 쿠스코 왕국이 시작되었다. 망코 카팍은 쿠스코왕국을 두 개의 사회인 하난(Hanan)과 우린(Hurin)으로 구분 통치하였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음양사상과도 같은 것이어서 음양의 원리에 따라 쿠스코를 두 개의 지역으로 구분하였고, 쿠스코 왕국 초기에는 우린 왕조(제1왕조)에서 왕위를 이어가다가 1348년 6대 잉카로카(Inca Roca)에 이르러 하난왕조가 시작되어 이후 계속 하난왕조(제2왕조)에서 통치하게 되었다.

HANAN과 HURIN

1438년 제9대(제2왕조 4대) 파차쿠티(Pachacuti) 통치에 이르러 주변국들을 정복하고 마침내 대제국 잉카를 성립하였는데 잉카제국의 공식 이름은 ‘타완틴수유(Tawantinsuyu)’이다. 쿠스코왕국에서 잉카제국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이 대를 이어갔고,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1533년 아타우알파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살해되었으나 망명정부를 수립하여 40년간 지속되면서 스페인 식민정부와 대립하다가 마침내 1578년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에 이르러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 1대 만코 카팍 Manco Capac (1198-1228 ; 쿠스코왕국 건국)
 • 6대 잉카 로카 Inca Roca (1348-1378; Hanan 왕조(제2왕조) 통치 시작)
 • 9대 파차쿠티 Pachacuti (1438–1471; 잉카제국 성립)
 • 13대 아타우알파 Atahualpa (1532–1533; 스페인 침공으로 처형)
 • 18대 투팍 아마루 Thupaq Amaru (1571-1578; 잉카제국 멸망)

잉카제국의 본래 이름 타완틴수유는 ‘4개의 땅’이라는 의미로서, 타와(tawa)는 ‘4’, 틴(-ntin)은 ‘집단’을 뜻하는 접미사, 수유(suyu)는 ‘땅’을 각각 의미한다. 잉카는 귀족들을 일컫는 명칭이며, 황제는 특별히 ‘유일한 존재’라는 의미로서 ‘사파 잉카(Sapa Inca)’라고 불렀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잉카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그들은 태양신 인티(Inti)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수도 쿠스코는 세상의 배꼽 즉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잉카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파차쿠티는 그때까지는 소국이었던 쿠스코 왕국을 잉카제국 즉 타완틴수유 제국으로 성장시켰고 그 배경에는 이 지역의 최대 국가였던 창카족과의 전쟁이 있었다. 창카족의 침입을 받은 쿠스코왕국은 당시 파차쿠티 왕자의 지휘아래 창카족을 무찔렀고 마침내 파차쿠티는 9대 왕으로 즉위하여 거대한 잉카제국을 성립하였다. 파차쿠티는 잉카제국을 연방 체제로 운영하였는데, 쿤티수유(Kuntisuyu; 남서), 친차수유(Chichasuyu; 북서), 안티수유(antisuyu; 북동), 코야수유(Qullasuyu; 남동) 등 4개의 수유로 이루어졌다. 

잉카의 4수유 개념 (자료 : wikipedia)



물의 신전, 탐보마차이 Tambo machay
Tambo는 숙소(객사)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며, 목욕탕이나 종교의식 등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탐보마차이는 쿠스코 일대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물의 신전이다. 가장 낮은 입구의 조형물에는 고도 2765m라고 명시하고 있고 안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제단은 필자가 직접 측정한 바 3811m로 기록되었다. 이는 지난 글에서 소개했던 티티카카호에 근접하는 높이로서 살짝 고산증 증세가 나타난다.


탐보마차이 가장 높은 제단의 높이 3811m


잉카의 목욕탕 건너편 제단과 샘물

탐보마차이 한쪽 언덕에는 잉카의 정교한 석조술을 느낄 수 있는 커다란 돌로 이루어진 4단의 돌층계 구조물이 쌓여 있고, 돌 틈 사이로 관개시설인 수로와 작은 폭포를 통해 물이 흘러간다. ‘성스러운 샘’으로 불리는 샘에서는 우기나 건기에 상관없이 언제나 같은 양의 물이 솟아난다. 날씨나 계절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물을 흐르게 하는 관개기술은 현대에서야 당연한 기술이지만 잉카 또는 그 이전의 문명에서는 뛰어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탐보마차이의 용도와 기능은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유력한 설로는 잉카 귀족들의 휴양처라는 설도 있고 잉카의 목욕탕(Inca’s Bath)이라고도 불린다.


탐보마차이 입구 및 안내도


탐보마차이의 다양한 얼굴. 왼쪽 : 신성한 샘, 위 가운데 : 제단, 위 오른쪽 : 미이라가 안치되었던 벽감

우리 조상들은 제사를 지내기 전에 꼭 목욕재계를 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정결하게 하였다. 아마도 이곳 탐보마차이는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잉카의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왕과 종교지도자는 (어쩌면 한사람일수도 있겠다) 이곳에서 먼저 신성한 성수를 한모금 머금고 난 후 몸을 정결하게 씻고 한쪽에 촛불을 밝히고 하늘과 땅의 잉카의 신들에게 간절하게 제사를 지낸다. 거룩한 신은 자비를 베풀어 잉카를 지켜준다.

물은 바위벽 뒤에서 흘러나오는데 수원이 어디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다만 주변 지하수이거나 멀리서 사이폰원리로 샘물을 끌어 모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샘물의 길 건너엔 천연 샘물이 끊임없이 솟는 3층의 돌층계 구조물로 받치고 있는 제단이 있고 이 제단샘물을 마시면 아기를 낳게 해준다는 미확인 전설이 내려온다. 직사각형으로 패어있는 벽감(niche)에는 미이라가 안치되었다고 한다.

탐보마차이 입구에서 신성한 샘까지 한참을 걸어 올라가는 동안 길 옆으로 원주민들이 때로 그들의 전통 상품을 진열한 좌판을 벌이고 있기도 하고 전통복장으로 사진 모델이 되어주고 약간의 모델료를 받기도 하면서 그들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탐보마차이를 오르는 길 가에 자리잡은 원주민과 라마


건너편 제단 위에서 내려다 본 ‘물의 신전’ 탐보마차이


탐보마차이 진입로에 좌판을 벌이고 있는 잉카 원주민


푸카푸카라(Pukapukara) 요새

‘붉은 요새(red fortress)’라는 의미로서 외침을 미리 탐지하고 방어하는 요새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군사용 목적과 행정 중심 기능이 어우러진 복합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핑크빛 바위로 이루어진 요새로서 현재는 건물은 없고 커다란 성벽과 테라스, 층계 등 흔적만 남아있다. 현재 전해오는 잉카의 화려한 유적들은 대부분 잉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세상의 개혁자’라 불리는 제9대 파차쿠텍(Pachacutec) 황제(재위 1438∼1471년)의 통치기간 중에 지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글에서 소개했던 쿠스코의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와 다음번에 소개할 삭사이와만 요새 등을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약3,700m 높이에 위치하여 계곡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성채는 적의 침입을 탐지하는 전망 기능과 아울러 오가는 이들을 위한 역참 혹은 잉카의 신들을 모시는 신성한 신들의 거주 장소로도 추측하기도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신들이 모여 살며 뒤로는 높은 구릉으로 찬바람을 막고 앞으로는 탁 트인 조망에 따뜻한 햇볕과 신선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신선의 세계에 가까울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멀리서 바라 본 푸카푸카라(위), 푸카푸카라에서 내려다 본 전경(아래)


푸카푸카라 요새 입구


잉카의 종교적 중심지, 켄코(Qenqo)
태초에 세상이 창조되고 태양신의 아들과 딸들이 내려와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그 첫동네가 이곳 잉카의 땅이라는 것이다. 태초에 세상이 창조되고 하늘의 신 환인의 아들 환웅이 땅에 내려와 마침내 단군할아버지를 낳고 우리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신화와도 유사하다. 그들과 우리는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많은 부분이 공유되고 있다.


켄코 입구


켄코의 여러 얼굴들

켄코는 케츄아어로 지그재그모양의 미로를 의미하는데,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유적으로서 멀리서 보면 그냥 커다란 바위덩어리로 보인다. 이 볼품없는 바위덩어리가 잉카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 장소였다고 하는데, 가까이서 보면 커다란 바위로 된 유물덩어리에 작은 지그재그 모양의 홈이 새겨져 있고 제단으로 보이는 깎은 단과 의식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다.

잉카의 종교적 성소로서 신들이 거주한다고 믿는 상징적 장소를 와까(Waca, Huaca)라고 부른다. 지난 글에서 소개했던 쿠스코의 코리칸차가 잉카의 종교적 중심지이며, 코리칸차를 중심으로 반경 20km이내에 332개의 와까가 분포하고 있다. 켄코는 그 중의 하나로서 바위를 정교하게 다듬어 쌓아올린 다른 유적과는 달리 거대한 바위덩어리를 그대로 이용하여 종교적 제단으로 숭배하고 있다. 거대한 바위 하나를 깎아 만든 성지, 잉카를 훨씬 앞서는 고대 어느 시기의 문명으로부터 그들은 오직 신앙 하나만으로 그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하고 노동력으로 지켜왔을 것이다.
 
바위유적 앞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퓨마 형상의 바위가 따로 모셔져 있다. 동지날 그림자 모습이 퓨마 형상을 하고 있는데 퓨마는 잉카문명의 상징과도 같아서 이미 소개했던 티티카카호, 쿠스코 등이 퓨마의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남미는 대부분 남반구에 위치하기 때문에 계절과 절기가 우리와는 반대이므로, 동지 즉 남미에서 연중 해가 가장 긴 날 그림자의 모습이 잉카의 상징인 퓨마를 닮았다고 하여 신성한 장소를 의미한다.

켄코유적지의 내부는 비좁은 동굴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제물을 받치던 제단과 황제의 옥좌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중미의 또다른 문화인 마야문명에서는 사람을 바치는 인신공양이 성행했다고 하는데 이곳 잉카에서는 인신공양의 흔적은 거의 없고 주로 동물을 바쳤다고 전해진다.


켄코유적 앞 거석(왼쪽) / 웅크리고 앉아있는 퓨마의 형상을 한 그림자(오른쪽)


켄코유적지 안쪽의 제단과 옥좌, 입구 등

글·사진 _ 박미옥 교수  ·  나사렛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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