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조경의 아버지 옴스테드, 그는 무엇을 우리에게 남겼나?

김수봉 논설위원(계명대학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
라펜트l김수봉 교수l기사입력2019-11-29
조경의 아버지 옴스테드, 그는 무엇을 우리에게 남겼나?




_김수봉(계명대학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




미국의 사우스 다코다州 러시모어 산에는 나라를 세운 ‘조지 워싱턴’, 땅을 넓힌 ‘토마스 제퍼슨’, 나라의 분열을 치유한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을 강국으로 만든 ‘시어도어 루즈벨트’ 등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조각된 초대형 큰 바위 얼굴이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만들고 초석을 다져 오늘의 강국 미국을 만든 대통령을 기억하려는 이민자들이 세운 미합중국의 태도와 자부심을 볼 수 있다. 독일말로 ‘바흐’(Bach)는 ‘시냇물’이란 뜻인데, 베토벤은 바흐를 시냇물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라고 추앙했으며, 쇼팽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 늘 연습하던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교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바흐는 성악곡들의 반주를 담당하던 바이올린과 오르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고 독주곡과 합주곡을 작곡해 이 악기들에게 그야말로 ‘아버지’처럼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일생을 통해 교회음악을 기존 성당 음악과 차별화하여 새로운 음악을 통해 개신교회 예배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바흐의 종교음악은 19세기 초에는 거의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멘델스존이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발굴해서 무대에 올린 뒤 바흐는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는 조지 워싱턴이요 음악의 아버지는 바흐다. 이렇듯 미국과 유럽은 나라를 세우고 음악의 기초를 만든 그 분야의 ‘아버지’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전통이 있다. 구글 검색창에 ‘Father of Landscape Architecture’라고 입력하면 ‘Frederick Law Olmsted(프레데릭 로 옴스테드)’가 검색 화면에 제일 먼저 나타난다. 미국에는 옴스테드 이전에 앤드류 잭슨 다우닝이라는 걸출한 조경가가 존재하였음에도 옴스테드는 도대체 무슨 특별한 업적을 남겼기에 ‘미국 조경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일까? 프레데릭 옴스테드는 1822년 4월 22일 미국 코네티컷州 하트포드市에서 태어났다. 옴스테드 조경관의 뿌리가 되는 자연관 형성에는 미국의 광활한 자연을 매우 좋아하여 틈만 나면 여기저기 가족을 데리고 다녔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옴스테드는 16세가 되던 해에 필립스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예일대학 진학을 준비했으나 개옻나무 중독으로 시력이 약화되어 진학을 포기함으로 인해 체계적인 고등교육을 못 받았지만 열정적인 독서와 청강으로 이론을 익히고 글쓰기를 통해 내실을 다졌다. 소년기에는 “경관이 상상력을 자극하여 강력한 효과를 낸다”는 폰 치머만의 저서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 후 우베데일 프라이스의 경관론(An Essay on the picture, 1794)과 윌리엄 길핀의 ‘숲 경관에 관한 소고(Remarks on forest scenery)’를 읽은 후 경관은 무의식적 과정을 통해 작용하여 도시생활의 심한 소음과 인공적인 환경에 의해 긴장된 인간의 마음을 편안하게 치유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그만의 독자적인 경관 철학을 가지게 된다. 옴스테드가 많은 답사여행과 농업활동, 토론으로는 실제적인 산지식을 몸으로 익힐 수 있었던 것은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 덕택이었다. 옴스테드는 정규 대학교육을 마치지 않고도 산지식을 토대로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하나씩 다져 당시의 타 지식인처럼 시민계몽과 사회변화에 높은 관심을 가진 참여 지식인으로 변모하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농업에 흥미를 가졌던 그는 20대부터는 근대적 농업경영자로서 성공하였다. 여행가이기도 했던 그는 27살 때 형과 친구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서 처음으로 외국의 풍물을 접했는데, 그 여행에 관한 감흥을 적은 책이 <미국농부의 영국견문기, Walks and Talks of an American Farmer in England>다. 이 영국여행은 그에게 두 가지의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하나는 그가 풍경식 정원과 공원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노예문제가 가진 비인도적인 면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후에 그가 조경가로서 활약을 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사고의 전환점이 되었다.

영국에서 귀국 후, 그는 신문사의 기자가 되어 미국 남부지방의 흑인 노예문제를 직접 취재하였다. 그의 노예문제에 관한 기사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으며 문필가로서 그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나중에 그는 노예제도의 반대자로서 남북전쟁에 직접 참가한다.

이와 같이 옴스테드의 삶은 농부, 문필가 그리고 기자 등과 같이 조경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우닝이 청년 시절부터 유명한 원예가였으며, 26세 때 정원이론에 관한 명저를 남긴 것과는 달리 옴스테드는 다우닝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살아왔다. 옴스테드가 겪었던 청년시절의 다양한 경험은 조경가로서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옴스테드는 19세기 당시 도시는 악이며 자연은 지고의 존재로 선을 상징한다는 초월주의자(transcendentalism)그룹의 선두 주자들인 소로우(Thoreau)와 에머슨(Emerson) 등의 자연관으로부터 그의 공원에 관한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옴스테드는 도시의 자연인 공원의 도입은 곧 선으로서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대도시에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옴스테드의 공원에 관한 또 다른 생각은 도시공원을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건강한 레크리에이션의 장소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는 공원에서 시민들이 편안한 휴식을 누리게 하여 도시생활의 스트레스를 없애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게 하는 장소로 공원을 조성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아울러 여러 계층이 융합하는 공원에서 일반 노동자들에게 상류계층의 매너와 생활방식을 배우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옴스테드가 공원이 당시의 산업화로 인한 도시문제를 통제하는 기제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음을 말해주는데, 결국 옴스테드의 공원은 도시를 살리고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소극적인 방어 기제였던 셈이다. 19세기 미국의 공원은 도시 노동자들을 교화하고 그들 가족을 지켜야한다는 미국 지식인들의 사회적 소명의 결과였다. 

한편 옴스테드의 센트럴파크는 대지를 구성하는 방식이 영국의 낭만적인 풍경식양식을 따랐을 뿐이지 원래는 뉴욕의 도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잘 준비된 도시계획의 산물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옴스테드는 뉴욕의 수돗물을 공급하는 유수지가 있는 센트럴파크지역을 도시의 난개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공원으로 만들었다. 센트럴파크의 조성은 뉴욕의 격자망을 통해 성장해가면서 생기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제 2의 도시계획이었다. 옴스테드는 도시공원을 도시의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매개로도 적극 사용했다고 한다.

옴스테드의 조경가로서의 활약은 1857년 뉴욕시의 센트럴파크건설현장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약관 35살이었다. 이때부터 46년 동안 그는 미국 ‘조경의 아버지’로 칭해질 정도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 미국을 디자인하다> 라는 영화의 내레이션에서 ‘센트럴 파크는 기적이 아니라 걸작이다(Central park is not a miracle, but it is a masterpiece)’라고 했나 보다. 그가 남긴 최대의 업적 중의 하나는 종래의 풍경식정원(Landscape Garden)을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으로 그 명칭을 바꾸면서 근대 조경의 이론과 방법을 확립한 것이다. 그는 조경의 대상 영역(target area)을 확실하게 확립하였는데 이는 근대조경을 왕과 귀족 소유의 정원과 같은 사적(私的)차원에서 시민을 위한 공원과 같은 공적(公的)차원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한 그의 노력으로 탄생한 것이 센트럴파크였다. 

시민을 위한 조경의 개념은 이미 다우닝에 의하여 시작은 되었지만 영국 풍경식정원의 영향은 막강하였다. 그래서인지 19세기 전반에 보여주었던 옴스테드의 노력은 주로 지방주택의 정원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남북전쟁이 발생하고 민주주의의 참된 의미가 논의될 무렵에 종래의 전통적인 정원이 상류계급의 상징물이었던 특징은 옴스테드에 의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미국의「Landscape Architecture」는 미국 민주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생겨났다. 그는 통합된 조경이론서를 발간하기도 했으나 옴스테드는 이론가로서보다는 실천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그가 조경이론에 대한 지식의 기반이 약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청년시절 사상가로서 활약했던 전력으로 미루어 볼 때 이론가로서 그의 능력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한다. 그는 실천을 통해서 사상을 현실화시켜나가는 조경가의 직능성(職能性) 혹은 전문성(專門性)을 확실히 하려했다. 이는 그가 남긴 40개가 넘는 공원계획과 국립공원의 제정, 그리고 자연보호계획 등과 같은 수많은 업적을 통해서 옴스테드가 얼마나 조경과 대중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왜 그가 ‘조경의 아버지’로 불리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이론은 실제로 옴스테드의 사무실에 근무했던 많은 조경가들에게 계승되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조경의 아버지’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의 조경관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자연주의 사상이었다. 그는 공원을 사회계층간의 갈들을 해결하는 장소로 인식하였고, 뉴욕시의 수돗물 공급원인 유수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도시계획적 차원에서 도시공원을 도시의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매개로도 적극 사용했다고 한다. 그의 최고 업적은 종래의 사적영역의 풍경식정원(Landscape Garden)을 공적영역인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으로 그 명칭을 바꾸면서 근대 조경의 이론과 방법을 확립한 것이다. 그는 조경의 대상 영역을 확실하게 확립하여 근대조경을 왕과 귀족 소유의 정원과 같은 사적(私的)차원에서 시민을 위한 공원과 같은 공적(公的)차원 즉 남녀노소, 인종과 계급을 불문하고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공공적이고 민주적 공간으로서의 도시공원을 창조했으며 그 결과가 센트럴파크였다.

1851년 뉴욕주는 세계 최초로 공원법을 제정하였다. 이미 그 무렵 유럽의 여러나라에서도 귀족들의 정원을 공공화하여 공원으로 전환시키고, 영국의 경우 1831년 내쉬(J. Nash)에 의해 레젠트파크가 계획되어 미국의 공원 조성은 크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민의 위락과 후생을 목적으로 하는 공공적 풍경의 법제화는 주목할 가치가 있었다. 공공법의 제정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공원법에 의해 전통적인 사적 정원의 울타리를 없애고 근대적 풍경의 공공성이 확립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근대사회의 공공적 풍경이 시민에 의하여 획득된 것이 아니라 대자본가의 기부에 의해 출발했다는 것이다.

옴스테드는 역사상 길이 남을 센트럴파크를 설계한 위대한 조경가다. 센트럴파크가 옴스테드와 같은 위대한 조경가를 만나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옴스테드는 ‘practical(실용성)’이라는 말을 매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아주 간단하고 실제적이며, 효율적인 것만 좋아하는 정치가나 투기꾼 그리고 사업가들을 특유의 기지와 수완으로 제압한 사회민주주의자였던 옴스테드의 활동은 센트럴파크의 설계에서부터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까지 36년 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는 조경을 예술로 간주해야할 뿐만 아니라 넓게는 시민이 물리적·심리적 요구에도 부응해야함을 강조했다. 시민의 요구란 경관의 기능적인 면을 말하며 옴스테드에 의하여 경관의 미적이면서 동시에 기능적인 이념이 추구되었다.

조경가로서 옴스테드의 활약은 다우닝이 그에게 소개시켜준 영국인 건축가 칼버트 복스와 팀을 이루어 센트럴파크 공모전에 일등으로 당선되었던 1857년부터 시작되었다.그 후에 그는 센트럴파크조성 주임기사로서 공원의 건설계획을 담당하다가, 남북전쟁으로 인해 조경가로서의 경력은 일단 중단된다. 남북전쟁에 참여하였던 그는 전쟁 중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나자 그는 다시 센트럴파크 공원조성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863년 임무수행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그만두었으나 이내 곧 복직한다. 그의 이러한 사직과 복직의 반복은 주임기사 재직 시 한두 번도 아닌 세 번이나 이어졌다. 이러한 방식으로 옴스테드는 당시 도시행정의 모순과 투쟁하면서, 조경가로서 그의 주장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다. ‘조경가(Landscape Architect)’의 명칭은 이 시기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그는 조경의 직능의 확립에 온힘을 쏟았다. 주임기사로 세 번째로 복직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복직하는 마당에 나는 ’조경가‘로서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가능하면 계획의 수정을 도모 하겠다’고 밝힌 그의 주장에서 그의 ‘타당성(Approrpiateness)’에 관한 사고방식은 언제나 그의 비판과 결정의 기본이 되었다. 옴스테드는 <실용성, Practical>의 부정과 <타당성, Appropriateness>의 긍정을 그의 경관 이념의 근본으로 삼았다. 실용성을 부정한다는 말은 경관의 기본적인 조건인 미적 이념을 긍정하는 것이고 자본주의에 의해 발생되는 문제인 상품물신적인 경관을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타당성의 긍정이라는 옴스테드의 가치관은 객관적이며 과학적 개념을 추구하는 것이며 주관적이며 자의적인 판단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옴스테드가 실용성의 부정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은 개인의 소유에 얽매여있는 사적경관의 수준을 공공적 경관으로 끌어 올리려 하는데 있었다. 옴스테드의 조경디자인의 근본적인 이념은 미(예술)와 기능(과학 혹은 법칙성)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과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지배하려는 법칙성의 기술과 예술에 의한 기술을 세련시켜 인간의 목적에 봉사하는 미라는 특징은 논리적으로 두 가지 다른 범주에 속하면서도 결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조경의 명칭, 직업, 이론과 방법 그리고 대상 그리고 센트럴파크라는 유산을 우리들에게 남긴 ‘조경의 아버지’ 옴스테드의 업적을 되돌아보며 필자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옴스테드에 버금가는 사상과 유산을 우리에게 남긴 우리나라 조경의 아버지는 과연 누구일까? 

한국 조경의 아버지를 찾는 학문적인 작업이 학회를 중심으로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 필자도 그 작업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다짐한다.

지난 4년 저의 졸고를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_ 김수봉 교수  ·  계명대학교 생태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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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kim@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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