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조경 같은 것, 안 해도 돼

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김영민 교수l기사입력2020-12-06
조경 같은 것, 안 해도 돼


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20살의 네가 조경의 틀에 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경이론서보다는 『이방인』이나 『데미안』을 읽었으면 좋겠다. 조경보다 인간을 말하는 소설과 시를 먼저 읽어본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기사시험을 위한 전공서는 넣어두고 시간이 된다면 『순수이성비판』이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완독해보았으면 좋겠다. 아마도 거의 모든 글귀가 이해가 안 갈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너는 가장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을 직접 접한 몇 안 되는 20살일 테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나중으로 미루지 마라. 분명히 말해줄 수 있는 것은 20살에 만난 니체는 40살에 만나는 니체와는 전혀 다른 니체이다. 만일 그녀가 그녀의 머릿결 같은 밤바다를 보고 싶다고 하면, 혹시 그가 그의 열정 같은 진홍빛 낙조의 바다를 함께 보고 싶다고 하면 망설임 없이 함께 가라. 과제 같은 것은 한 주쯤 못해도 상관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학점을 저울질하는 그런 보잘것없는 인간이 되지 마라. 설계실이나 도서관에 박혀 있지 말고 겨울의 월악산과 가을의 우포늪을, 여름의 남해와 봄의 황매산을 보았으면 한다. 컴퓨터 화면에서 조경사례 사진을 종일 찾기보다는 하늘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20살의 하늘은 그 어떤 나이의 하늘과도 다른, 깨질 것 같은 시린 푸른색이다. 지금은 너의 20살이 얼마나 빛나는지 모를 테지만 후일 초라한 줄만 알았던 찬란함을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의 조각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조경 같은 것, 하지 않아도 된다.

24살의 네가 가장 너다웠으면 좋겠다. 군대 제대 후, 교환학생을 갔다 와서, 뒤늦게 전과나 편입을 해서 두려운 것은 당연하다. 이제는 어리다고 할 핑계도 없는데, 온전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버거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괜찮다. 여전히 24살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도 되는 시기이다. 굳이 너를 남과 비교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친구, 엄마가 이야기하는 형이나 언니, 동기들과 너는 다르다. 너의 세계를 남의 기준에 맞추어 초라하게 만들지 말았으면 한다. 다만, 24살에 네가 좋아하는 음악도, 책도, 영화도 무엇인지도 말하지 못하는,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 바보가 되지는 말았으면 한다. 네가 조경을 전공했다고 해서 조경을 좋아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들에 떠밀려서 조경을 공부해왔는지, 아니면 네가 조경을 좋아하는 것인지는 알았으면 좋겠다. 만일 조경이 힘들기만 하고 어떤 감흥도 없다면 조경을 하지 마라. 지난 몇 년 동안 조경의 경험이 아깝다고 남은 인생을 좋아하지도 않는 일에 낭비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는 마라. 나다운 내가 조경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조경 같은 것, 하지 않아도 된다.

29살의 네가 여전히 꿈을 꾸는 사람이면 좋겠다. 만일 조경가가 되기로 했다면 길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일을 했을 것이고 지금쯤 기대보다는 실망의 감정이 더 클 수 있겠다. 일이 고되다는 것은 각오했지만 한고비가 마무리될 때 즈음 또 다른 일이 밀려오고, 연봉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꾸 대기업에 간 동기들과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가족들의 눈에 나는 그저 그런 작은 중소기업에 다니는 아들, 혹은 딸일 뿐이고 조경이 무엇인지 아무리 설명해도 아빠는 내가 하는 조경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어느 날 퇴근길에 더이상 조경을 통해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조경을 잠시 멈추어도 된다.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현실의 무게가 꿈의 부력보다 컸을 뿐이다. 마감과 보고에서 벗어나 네가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을, 잊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을 해보았으면 좋겠다. 즐겨찾기에 저장만 해두었던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고, 해보고 싶었던 운동을 배웠으면 좋겠다. 하루종일 영화와 만화를 보고 모두가 출근할 때 혼자 맛집을 찾아갔으면 한다. 그렇게 한동안 조경을 잊고 지내다가 조경이 다시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이제는 조경을 통해서 꿈을 꾸지 않는다면, 조경 같은 것,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그때 너 자신도, 조경도 원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힘들게도 했지만, 행복하게도 했던 연인을 보내듯이 떠나보내면 된다. 조경이 아닌 것을 통해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다면, 조경 같은 것,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조경이 재미있고, 조경을 통해 이룬 일이 뿌듯하고, 가끔은 조경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조경을 계속했으면 좋겠다. 20살의 네가 여행을 떠나 남들이 관광지에서 인스타를 찍기에 여념이 없을 때, 풍경을 눈에 담고 바람을 느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그냥 나무였던 것들이 각각 이름이 있음을 알게 되고, 잡초 같은 풀이 초여름 찬란한 꽃을 피우리라는 것을 엄마에게 말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어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공간을 새롭게 읽을 줄 알게 되고, 시인의 감성으로 이른 아침의 하늘과 늦은 일요일 오후의 숲에 감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 

조경을 어느 정도 배운 24살의 네가 좋아하는 조경가가 한 명쯤은 생기기고, 꼭 직접 가보고 싶은 조경 작품이 서너 개는 생기면 좋겠다. 평온해 보이는 숲에서 신갈나무, 졸참나무, 물푸레나무, 조팝나무들이 치열하게 경쟁을 하면서 서로 의지하는 서사를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무심코 지나쳤던 공간이 이렇게 바뀌면 좋을 텐데 머릿속으로 그려보기 시작하면 좋겠고, 멋있는 공간을 잡지에서 보았을 때 나도 그런 공간을 설계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하면 좋겠다. 떨어질 것을 창피해하지 말고 계속 공모전에도 도전하고 동료들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는, 스스로 클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나가면 좋겠다. 그리고 선생이든, 부모든, 친구든, 남들이 평가하는 나의 가치에 휘둘리지 말고 나의 가치는 나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조경을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29살의 네가 밝고 희망에 차 있으면 좋겠다. 지금 맡은 소임보다 항상 더 큰 것을 향해 나아가고, 선배 세대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의 내가 가진 한계를 돌아보고 늘 겸손하되, 결국에 나의 한계를 넘어서면 모든 조경가들을 씹어먹을 수 있다는 포부를 가졌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보다 항상 더 성장한 나로서 살아가고, 어쩌면 지금 나의 자리가 누군가는 꿈꾸어온 자리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가슴을 늘 펴고 다니면 좋겠다. 유학을 가서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들과 나란히 경쟁하거나, 나의 사무실을 열어 내 설계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리라는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선배들이, 소장들이, 선생들이 말은 안 해도 늘 너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너는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대단하다는 것을, 더 훌륭한 조경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조경을 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 조경을 하는 모든 20대에게, 그리고 2020년을 살고 있을 20대의 나에게 -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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