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포럼] 아파트 그림자가 사라진 풍경

박준서 디자인 엘 소장,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운영위원
라펜트l박준서l기사입력2016-12-21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 Series No.19



아파트 그림자가 사라진 풍경




박준서 디자인 엘 소장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운영위원 



어느 뜨거운 여름 일요일, 늦은 아침을 챙겨먹고 마나님과 함께 마당에 나와 차를 한잔 마시고 있다가 부쩍 자란 잔디와 웃자란 일년초들이 눈에 들어온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시던 차를 테이블에 놓아두고 일어나 잔디를 깎고, 일년초를 뽑는다. 그리고는 다시 앉아 차를 마저 마시며 저 코너에는 가을에 구절초와 내년 봄을 위해 튤립을 심어볼까 생각한다. 짧은 오전을 보내고 뜨거운 오후 햇살이 뉘엿해질 즈음 우리는 다시 삽과 호미를 들고 이곳 저곳을 파고, 이 꽃을 저기로 저 꽃을 여기로 옮기고 물을 주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는 사이 옆집의 마당 다듬는 모습

에 참견을 하고 씨앗과 꽃을 나눠 심는다. 



자연에 다가가고 싶다 자연에 다가가고 싶다 Ⓒ 박준서 


최근 이사 온 작은 마당이 있는 이 집에서 주말이면 흔히 벌어지는 일상이다. 전에는 방청소하는 것도 마다할 정도로 몸을 움직이길 싫어했는데 가끔 우리 스스로의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런 활동들이 귀찮거나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저렇게 더 해보고 싶어 옆에서 말려주어야 할 지경이다. 그리고 그 잠시의 몸놀림은 일주일동안 쌓인 피로를 낮잠보다 더 효과적으로 풀어준다.


이전엔 아파트에 살았다. 제법 오랫동안 마치 습관처럼, 당연한 듯이 아파트를 집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우리 가족이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역할함과 동시에 재산을 불려주는 소중한 재화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 안돈감과 편안함을 느껴본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만나는 이웃은 언제봐도 익숙칠 않았고, 왠지 인사를 나누기에도 서먹했다. 그리고 얼굴을 기억할 만하다 싶으면 이사를 가고 그곳에 전혀 새로운 이웃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주말이라 아이 손을끌고 단지 안을 둘러볼라치면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를 풍경들에 이내 마음이 상했다. 값비싼 놀이터는 텅 비어있고, 단풍들고 꽃이 피는 숲속의 산책로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집 안 창밖으로 보이는 뒷산 풍경이 오히려 맘을 더 편케했던 기억이 있다.


매체를 통해 들려오는 나날이 심각해져 가는 아파트에서의 다툼. 예전에는 옆집과 문을 열어 두고 살았고 윗집의 아이들이 뛰면 ‘그놈 참 씩씩하네’하며 웃던 기억도 있었는데 이젠 그런 일은 없는 듯하다. 문을 닫고 들어가면 세상과 철저히 절연되는 회색금고 같은 집. 그런 절연은 물리적 절연체일 뿐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매우 비싼 집에 살고 있다며 자족하고 있다. 윗집 아이들이뛰는 것은 소중한 나의 재산을 침해하고 흠집을 내는 행동이므로 응징의 발길질을 날릴 빌미가 되는 것 같았다.


아파트가 이론적 아이디어로 제시된 후 실제 지어진 것은 이차세계대전 이후 패망한 독일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후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 남미 등에서 우후죽순으로 아파트가 지어졌지만 이내 아파트는 사람들에게 살만한 집으로서 인식을 얻는데 실패하고 우범화되거나 슬럼화되었으며 주거공간 유형으로서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바로 그 시점, 즉 해외에서는 주거공간으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리던 시점부터 들불 번지듯 번졌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아파트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피폐한 주거환경 문제를 상대적으로 매우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해줬을 뿐 아니라 경제부흥에도 엄청난 기여를 한 주거형식이다. 한 외국의 학자가 이를 두고 우리나라를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부른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녀가 주장한 한국에서 아파트는 단순히 거주공간으로서 가치보다는 사회적 신분을 상승시키는 수단이며 재산가치로서의 역할이 상당히 큰, 그래서 누구라도 더 크고 더 비싼 아파트를 가지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아파트는 한국 조경계를 부유하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집을 수직으로 쌓아올리고 그만큼 빈곳을 녹지로 만들어 거주민들이 공동으로 즐기는 것이 아파트 단지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건물만큼이나 이 녹지는 아파트를 구성하는 중요한 존재이다. 이런 공간에 우리는 열심히(듣자하니 어떤 설계사무소는 한 해에만 약 300개가 넘는 아파트단지를 설계했다고 하더라) 조경공간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렇게 빠르게 많이 쏟아낸 아파트단지의 조경공간은 얼마나 양질의 것이었을까. 그 조경공간은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정말 잘 모르겠다.


재산으로서 인식되는 아파트는 제공자들에 의해 역시 재화인 상품으로 인식되어 공급된다. 상품화된 주거공간, 일상에서의 쓰임보다는 소유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가치가 더 우선시 되는 주거상품. 거기에는 일상이 스며들 기회가 없다. 거기에는 내가 땀 흘려 가꿀 대상도 없고, 이웃과 관계를 만들어 갈 기회도 별로 없다. 어쩌면 이 두가지는 집이 가진 가장 근본적 역할일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 피상적 소유물로서의 상품을 만들어 낼 기회가 줄어드는 것에 우린 울상을 지어야 할 것인가? 날이 갈수록 금고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인간적인 관계를 끊어가고 있는 이 아파트 개발의 종말을 슬픈 눈으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


이제는 떠나온 아파트라는 공간을 다시 생각해본다. 아파트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선언하고 싶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역할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피상적으로 바라만 보는 대상으로서의 경치를 이룬 채 우리 삶과 밀착되지 못해 분리되 있으며 그 안에서 인간과 인간이 서로 긍정적 관계를 맺어가지 못하는, 그저 소비되기만 하는 조경공간과 마치 공장 근로자처럼 이를 배출해내는 조경가가 있었다. 이제는 일상에 깊이 소용되고 스스로 가꾸며 이웃과 함께 하는 삶에 마음 따뜻해지는 풍경을 만드는, 우리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자연과 동화된 삶이 투영된 공간을 만들어 내는 조경가가 필요한 때이다. 이런 조경가들이야말로 이 땅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 미래를 그려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돈벌이 수단으로의 조경이 아니라, 상품을 만들어 내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 드러날 수 있는 그야말로 삶의 풍경을 만드는 사회적 역할로서의 조경이 절실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창밖에 비가 내린다. 예전 아파트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비가 땅에 닿는 소리가 들린다. 어린 시절, 시골 처마에서 떨어진 빗방울 이 땅에 닿던 소리와 닮았다. 나도 모르게 근심도 걱정도 없었던 그 시절로 빠져 들어간다. 아파트의 그림자가 사라진 이곳에서 는 어쩌면 더 자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라펜트는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과 함께 조경의 미래방향을 모색하는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를 매달 1회씩 게재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현재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향방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조경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논의의 장으로서 조경인 모두의 관심과 함께 연재가 이어가기를 기대해봅니다.

 

*1월 필자는 조세환 교수(한양대학교) 입니다.


박준서  ·  디자인 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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