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포럼] 놀이에 대해 생각하다

김아연 서울시립대학 교수
라펜트l기사입력2017-08-23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 Series No.27



놀이에 대해 생각하다




김아연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운영위원



놀 권리, 게으를 권리, 일하지 않을 권리를 허하라

나의 삶에서 일과 놀이, 휴식과 공부의 경계가 사라진 지 오래다. 경계가 사라진 삶, 잘못 들으면 놀 듯이 일하는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한 것이라 착각할 수도 있겠으나,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휴가지에서도 카톡과 이메일로 끊임없이 전달되는 각종 업무 내용과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급급한 내 모습은 일에 종속된 도구적이며 수동적인 인간일 뿐이다.

주변을 돌아봐도 비슷하다. 하루에 미팅 서너 개를 뛰고, 저녁 시간 이후에야 비로소 책상에 앉아서 밀린 일들을 하게 된다는 설계사무소 소장들과 교수들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듣다보면, 결국 우리는 노동을 통해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자 했던 “근대적 인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치열한 삶, 일과의 결혼, 남들 놀 때 하나라도 더 하려는 악바리 근성, 잠과 여가를 줄여 얻게 되는 성취, 일에 관해서는 피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릴 것 같은 냉철함, 철저한 자기관리와 성실성 등 잘나가는 전문가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는 드라마에서 재생산되지 않더라도 우리 시대에 팽배해있는 악성코드 같다. 이러한 전문가에 대한 신화적 이미지와 만성화된 갑질문화로 인해 조경이라는 일은 이미 놀이의 속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근대적 인간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호모 파베르(Homo Faber)를 들 수 있다. 파베르는 도구를 사용한다는 의미인데, 18세기 산업혁명과 과학기술 발달을 특징으로 하는 시기의 특징적인 인간상을 묘사하는 개념이다. 기술 혁명과 공장제 노동은 청교도적 직업윤리와 결탁하여 쾌락을 금기시하며 놀이와 유희를 폄하하는 시대정신을 확산시켜왔다. 네덜란드의 학자 하
위징아가 탐구했던 놀이하는 인간으로서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개념은 이러한 도구적 인간에 대한 부정으로,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놀이와 문화가 갖는 창의적인 힘에 주목한다. 이처럼 노동과 놀이는 근대적 삶의 스펙트럼 상 대척점에 있지만 인간의 노동을 수단화하고 소외시킨 근대성에 대한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과 대비되는 놀이는 목적성보다는 무목적성을, 유용성보다는 쓸모없음을, 필연보다는 우연성을, 의무보다는 자유를, 결과보다는 과정지향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다시 우리 주변을 살펴보자. 공원을 만드는 사람들이 정작 바빠서 일반 시민들보다 더 자주 공원에 가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는 마스터플랜에는 각종 놀이와 여가를 위한 공간들이 짜임새있게 그려진다. 우리들이 하는 일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무엇일까? 물리적으로는 사람들이 꿈꾸는 자연과 문화가 만드는 특정한 경관의 구조와 조형을 만드는 것일 테고, 내용적으로는 사람들의 휴식과 놀이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닌가. 시민들의 휴식과 여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정작 쉬지 못 하고 즐기지 못한다. 놀이를 디자인하는 사람들이 잘 놀지 못하며, 놀이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놀이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다. 조경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자신들이 만들어야하는 공간에 대해 늘 외부자적으로 접근하며 몰입하지 못하고, 관성에 의존한 채 자기 성찰능력과 미래에 대한 상상을 게을리 한다는 것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내가 고민하지 못한 것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까? 결국 이렇게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들은 재미없으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최근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시에 새로 만들어진 공원들을 답사하며 도대체 40년이 넘도록 축적된 우리나라 조경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에 대해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그들이 놀이와 여가와 휴식과 쉼에 대해 철저하게 사유했을 리 만무하다. 놀이는 어린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놀이터의 시설물과 안전기준을 고민하는 것과 더불어 놀이 자체에 대한 사유와 성찰이 필요하다. 즉 놀이터에 대한 도구적 생각이 아니라 놀이, 인간의 본능과 욕망에 대한 깊이있는 논의가 먼저이다. 해외의 예쁘고 쿨한 놀이터 사례를 흉내 내기보다는 우리나라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처한 현실과 그들의 욕구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


ⓒ김아연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공간을 지배한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얘기들이 대중적 담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의 많은 직업들이 사라질 것이며, 노동 시간은 단축될 것이고, 기계와 컴퓨터가 사람을 대체할 것이라고 한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실업률이 올라갈 것이고 기계와 IT에 소외된 사람들이 늘어갈 것이며, 첨단 과학 기술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사회적인 병리현상 역시 만연할 테지만 반대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수명 연장을 포함해서) 중, 일하지 않는 시간의 비중이 더 커지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혜택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늘어난 일하지 않는 시간에 과연 사람들은 무엇을 어디서 하게 될까? 근대적 도시에 있어서 노동 현장과 공원은 직접적인 대립과 상호 보완 관계에 있었다. 도시의 노동자들은 끔찍한 노동 현장과 주거 상황이라는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연으로서의 공원을 원했으며, 그들은 일터를 벗어나 바로 공원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현대 혹은 미래의 도시에 있어서도 일터를 떠난 사람들이 바로 공원으로 향할까? 누구도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아파트는 그들만의 공원을 가지고 있다. 최근의 아파트 단지에 가본 사람이라면 집 밖에 펼쳐진 공원을 놔두고 주차 전쟁을 치르면서 다른 공원에 갈 필요성을 못느낄 것이다. 봄에는 미세먼지 때문에 밖에서 놀려하지 않는다. 기후변화로 인해 길고 매서워진 여름과 겨울의 날씨에는 쇼핑몰이나 영화관(심지어는 실내형 테마파크)같은 쾌적하게 통제된 실내 공간을 선호한다. 젊은이들은 호텔놀이, 카페놀이, 시체놀이 등 도심에서 즐기는 스테이케이션(staycation)을 선호한다. 불금(불타는 금요일)을 잠금(잠자는 금요일)이 대체하고 있다는 기사도 등장했다. 청소년들은 공부하지 않는 시간에는 컴퓨터 게임에 몰두한다. 잠시 포켓몬고가 젊은이들을 공원으로 오게 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라고 여기기도 했으나, 그건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다. 결국 공원을 포함하여 외부공간을 다루는 우리들의 미래의 적은 건축가나 도시, 토목 전문가가 아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경쟁자들은 게임회사, 쇼핑몰, 호텔과 스파, 영화관과 각종 실내 놀이방, 건강과 스포츠 관련 회사, 스마트폰 앱 개발자 등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잉여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미래 산업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각축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가 시간을 지배하는 산업, 놀이를 지배하는 산업이 미래 공간 산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과연 우리는 퇴근하는 사람들의 저녁이 있는 삶을 공원으로 이끌 수 있을까?

최근 나는 일련의 어린이놀이터 프로젝트에 관여할 기회가 많았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놀 권리”를 보장하라는 유니세프의 권고는 서글프기까지 하다. 이러한 현실은 단지 어린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대로 놀지 못한 어린이들이 어느덧 성장하여 지금의 놀지 못하는 어른들을 만들었다. 놀이로부터 소외된 부모들이 그들의 아이들을 놀이터가 아닌 학원으로 내몰고 있다. 어린이에게도 어른에게도 놀이가 필요하다. 놀이는 노동과 공부, 목적이 있는 삶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창의적인 재충전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버트랜드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강조했듯이, 노동하지 않는 시간에 대한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 게으름이 주는 사색과 지적 유희, 자유와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과 총체성을 회복할 권리를 찾아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놀 권리를 허하라. 그리고 전문가로서의 우리는 놀이와 놀 장소에 대해 진지하게 그러나 유희적으로 사유하자. 결국 미래에는 시간을 지배하는 자, 특히 놀이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공간을 지배할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우리는 놀이로서 접근할 수 있는가?


라펜트는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과 함께 조경의 미래방향을 모색하는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를 매달 1회씩 게재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현재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향방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조경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논의의 장으로서 조경인 모두의 관심과 함께 연재가 이어가기를 기대해봅니다.

 

*9월 필자는 이창환 상지영서대 교수입니다.


_ 김아연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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