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일에 초월하고 자연에 몰두하여 살려 했던 송준길의 대전 옥류각(大田 玉溜閣)
[조경명사특강]이재근 교수의 ‘한국의 별서’ 25회라펜트l이재근 교수l기사입력2014-08-29
“知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에 밝아 막힘이 없는 것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늘 물을 가까이 하며 즐기고, 어진 사람은 모든 일을 도리에 따라서 처리함으로 신중하고 덕이 두터워 산을 좋아한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며, 어진사람은 조용히 지내기를 좋아 한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므로 오래살고 어진사람은 고요한 성격으로 집착하는 것이 없어 오래 살기 마련이다.”
- 논어(論語)의 옹야 편(雍也 編) -
옥류각의 내원도 (김영환.2014): 여름의 옥류각의 내원을 진입로입구 초원물외와 계류 ,폭포등을 표현한 진경산수화로 표현했다. 그러나 평소에는 수원이 많이 말라 이러한 경관을 창출하지 못하여 안타깝다.
옥류각의 가을
대전 옥류각은 대전시 비래동 비래암 앞에 현존하는 누각으로 조선 효종 때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1672)이 자연을 벗하며 거처하였던 별서이다. 옥류각은 논어에 나오는 지자요수(知者樂水)요, 인자요산(仁者樂山)인 곳에 위치한다. 도심지와 뚝 떨어져 있고, 세상 물정을 멀리하면서 자연에 몰두하고자 하는 초연물외(超然物外)의 정신이 서려 있는 장소이다. 산림이 우거진 정자 앞으로는 계족산(424m) 중턱의 맑은 물이 유유히 흐른다.
송준길의 집은 경부고속도로 안쪽 대덕구 송촌동 동춘당 공원 뒤편에 있고 지금도 그의 후손이 살고 있다. 동춘당 공원을 들어서서 돌담길을 따라 가면 별당채인 동춘당이 있고, 사랑채와 안채가 나타난다. 사진에서 우측으로 보이는 건물이 현 송씨 가문의 4대조 신위를 모시는 송씨 가묘(宋氏家廟)이고, 동춘당별묘(同春堂別廟)는 송준길 선생만 별도로 모시고 불천위(不天位)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불천위란 국가에 큰 공을 세웠거나 학덕이 높아서 신위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고 나라에서 허락한 제사를 올리는 것을 말하는데, 송씨 가묘와 동춘당 별묘의 존재는 그런 점에서 대전지방에서의 송씨 가문의 위엄을 느끼게 해준다.
송준길 옥류각 본제와 사랑채: 비래동 옥류각의 본제인 송준길 고택.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담장을 두어 분리시킴으로써 별도 사유공간으로서의 격조를 갖추었다. 고택 우측 뒷편으로는 송준길의 사당인 송씨별묘와 송씨가문의 조상을 모신 사당 송씨가묘가 설치되어 있어 송씨 가문의 뿌리가 느껴진다.
송준길의 별당채 동춘당(강충세.2013): 송준길이 머물렀던 동춘당. 이는 송준길 고택의 별당으로 학문하는 장소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며 송준길은 이 별당의 건물명 동춘당(同春堂)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동춘당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송용억의 가옥도 있는데, 송준길의 둘째 손자 송병하(1646-1697)가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옛날에는 송준길 고택 주변 일대가 은진 송씨 집안이 모여 살던 곳이었는데, 이제 아파트촌으로 변하고 몇 집만이 남아있어 안타깝다.
송준길은 이곳 송촌동에서 태어나 양반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고, 장성한 뒤에 김사계(金沙溪)에게 수학하여 소학, 가례 등을 연구하였다. 우암 송시열과는 같은 집안의 조카뻘이지만 친구처럼 지내 우애가 돈독한 사이로, 함께 한문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도 오래도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을사년(1665년)에 현종이 온양온천에 와서 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하니 상경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이후 대사헌과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한 뒤 낙향하여 학문하면서 살았다. 서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우복 정경세의 딸과 혼인하여 영남의 동인들과도 가까웠다.
동춘당묘지(同春堂墓誌)에 송시열은 송준길을 “천자절이(天資絶異), 정명온수(精明溫粹), 영철무가(瑩澈無暇), 색이기화(色夷氣和)”라 하여 그의 천재적 기질과 청명한 마음, 근면함과 친화력이 많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유교(儒敎)에서의 맑고 깨끗한 교리를 좋아했고, 이퇴계의 종신사법(終身師法)의 도를 배웠다”고 함은 송준길의 정파를 떠나 배우려고 하는 학문적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송준길은 예학과 시문에 탁월하고 필명이 높았으며, 시문집으로 동춘당집(同春堂集)을 남겼다.
옥류각 근경
송준길은 고택과 별당채인 동춘당이 사람들도 많이 오고 번잡하므로 뒷산 비래암을 또 하나의 별서터를 삼고 학문하는 장소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동춘당에서 독서와 휴식을 취하다 문득 세속을 떠나 자연과 하나 되고 싶을 때면, 본제에서 좀더 떨어진 이곳 계족산 아래 비래암을 찾았던 것 같다. 거리로는 2km 는 족히 될 성 싶다.
현재의 옥류각은 정확히는 은진 송씨 문중의 서당이었던 비래암에서 송준길이 강학하고 심신을 수련했던 것을 기념해서 송규렴(1630-1709) 등 제자와 문인들이 1693년 비래암 앞에 세운 누각이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지혜롭고 어진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송준길의 문하생들이 주축이 되어 계류를 끼고 지은 누각인 것이다. 송상기(宋相琦)의 옥류각상량문(玉流閣上梁文)을 읽어보면 이러한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대전옥류각의 위치도
옥류각의 여름 원경(강충세.2013)
옥류각(玉流閣)이란 명칭은 송준길의 시 “층암비옥류(層岩飛玉流), 적우세창태(積雨洗蒼笞)”의 옥류(玉流)란 물의 표현에서 연유하였으며, “층층 바위에 날리는 옥 같은 물방울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옥류각 현판은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 1624-1701)의 글씨다. 한편 옥류각 입구 기암 위의 “초연물외(超然物外)” 4자는 송준길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이 암각자는 송준길이 이곳 옥류각 지역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였는지를 알려주는 증표이다.
초연물외 원경: 세상물정을 떠나 자연에 귀의하고자 하는 작정자의 의도가 돋보이는 암각이다. 초연물외는 동춘당 송준길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초연물외 근경
옥류각의 건물은 전면3칸* 측면 2칸으로 8각 석주 위에 단주( 丹柱)를 세우고 그 위에 마루를 깔고 누각을 세워 안정감있으면서도 날렵한 형태의 누각이다. 옥류각은 주로 조망 및 강학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우측 1칸에는 온돌방을 두었는데, 그 방 밑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어 한층 운치를 더하고 있다.
옥류각건물내부1(방쪽: 강충세.2013)
옥류각원경2
옥류각 별서의 공간구성을 나누어보자면 비래동마을 입구에서부터 초연물외(超然物外)암각까지가 진입부(進入部)이고, 초연물외 바위와 옥류각 정자건물, 그리고 비래암 주변이 내원(內園)부분, 비래암 위쪽 계곡과 계족산(鷄足山) 주변산록이 후원(後園)부분, 진입부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채원은 실용정원으로 볼 수 있다.
본 별서의 주 구성요소는 옥류각과 비래암, 송준길이 기거한 살림집 등의 건물적 요소와 계류, 폭포로 이어지는 수경요소 “초연물외(超然物外)”란 글씨가 새겨진 암벽과 폭포가 떨어지는 바위, 암자뒤쪽의 암벽 등의 경물적 요소, 그리고 느티나무를 비롯한 대형수목의 배치, 사방으로 둘러싸인 산세와 원림 등이다.
옥류각의 본제는 송촌동에 있는데, 그곳에서 별당채인 동춘당(同春堂)을 거쳐 옥류각으로 이르는 길은 동춘당 송준길이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며 산을 오르던 길이다.
송준길의 별서 옥류각을 가려면 송촌동의 선비마을 뒷길의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야 한다.
거기에 고성이씨(固城李氏) 동족마을인 비래골 마을이 나타난다. 약 600여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다. 그 옆에는 BC 7-6세기로 추정되는 고인돌도 있어서 이 지역이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전옥류각의 외원도(김영환.2014)
옥류각 원경1 : 단아한 모양의 누각이 계류위에 서있다.
“초연물외”란 각자바위를 지나 옥류각에 오르면 방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來遊諸秀才 愼勿壁書 以汚新齋; 공부하러 온 수재들은 벽에다 낙서를 해서 새 재사건물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의 현판이 걸려있다. 1647년(인조25) 종중에서 승려를 시켜 비래암을 중창하게 한 후 낙성되자 송준길이 위의 글을 써서 문하생들에게 건물을 더럽히지 말고 쓸 것을 정중히 주문한 것이다.
송준길은 율곡 이이를 숭상하는 기호학파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학파와 당파를 초월하여 퇴계의 학덕을 흠모하였고, 꿈에서 퇴계를 만나 가르침을 받은 사실을 진솔하게 시(詩)로서 밝히기도 했다.
동춘당연보에는 송준길이 쓴 기몽(記夢)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平生欽仰退陶瓮 : 평생 동안 퇴계 선생을 흠모했더니
夢裏精神尙感通 : 꿈속에서도 정신이 감동하여 통하였네.
今夜從容承誨語 : 오늘밤 꿈속에서 가르침 받았는데
覺來山月滿窓瓏 : 깨어보니 달빛만 창문에 가득하네.
그는 이 시를 지으면서 “임자년(1672) 1월 11일 밤 꿈에 퇴계 선생을 모시고 함께 자면서 간절한 가르침을 받았는데, 꿈에서 깬 뒤에도 남은 향기가 몸에 가득하므로 이 시를 짓는다.”라 했다. 이는 우연히긴 해도 이 해에 퇴계 선생이 돌아갔음으로 그가 퇴계를 얼마나 흠모하고 따랐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당파를 초월한 인격 있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 배우고자 하는 열정, 학문에 대한 태도, 제자들에 대한 따끔한 훈계 등은 요즘같이 지역을 편 가르고 정쟁을 일삼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옥류각의 여름근경 (강충세.2013): 옥류각은 계류의 부지관류형 형태로 경쾌한 청량감을 준다.
옥류각건물내부2(마루: 강충세.2013)
비래암은 송씨 문중의 서당이었는데 현재는 조계종에서 보호 관리되고 있다. 그런데 암자는 1980년대 초 소박한 암자에서 지금은 커다란 암자로 확대되었다. 암자 주변의 환경 역시 새로 터를 잡고 건물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자연환경이 많이 훼손되었다. 들어오는 입구 쪽까지 주차장이 들어서 있고 인위적인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서 옥류각의 단아한 풍경은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내가 처음 답사를 시작한 1980년대 중반의 계곡물이 흐르고 폭포소리가 들리는 옥류각의 풍경은 정말 이렇지 않았다. 그 청량함과 단아함은 무어라 표현 할 방법이 없을 만큼 아름다왔다. 비래암은 옥류각의 부속물처럼 있는 듯 없는 것처럼 보였고 단연 옥류각이 중심이 되는 경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변해도 너무 변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향후 국가적인 차원에서 시문 해석 및 고증을 통한 정비계획이 이루어져 암자를 비롯한 주변 환경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개선되기를 바란다. 송준길의 고택은 물론 고택에서 옥류각까지 이르는 별서 길도 자연 친화형 소로 길로 복원되길 기대해 본다. 그리하여 송준길이 산 좋고 물 좋은 이 곳 별서 터에서 후학들을 강학했고 제자들이 대를 이어 그 뜻을 이어 왔던 선비정신과 풍광을 되살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재근 교수(전)의 '자연과 철학을 담은 정원, 한국의 별서'는 문화재청이 운영하는 헤리티지채널의 '명사칼럼'을 통해 기사전문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헤리티지채널은 국민의 문화유산 애호의식을 함양시키기 위한 고품격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문화유산 전문 채널입니다. 라펜트 조경뉴스는 이재근 교수의 조경명사특강을 헤리티지채널과 함께 일주일에 한번씩 게재하고 있습니다.
- 연재필자 _ 이재근 교수 · 상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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