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청계동천(淸溪洞天) 아래 자리 잡은 도심형 별서, 서울의 부암정(傅巖亭)

[조경명사특강]이재근 교수의 ‘한국의 별서’ 12회
라펜트l이재근 교수l기사입력2014-05-23


서울집. 친구 이종원(李鍾元)씨와 부암정에서 오후를 보냈다. 그는 부암동 마을에 있는 새집의 이름을 제안했다. 한 선비가 축우부암(築于傅巖)이라는 건물을 짓고 있는 동안 최고통치자로서 왕국을 통치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유명한 얘기가 중국고사(中國古事)에 있다. 따라서 그는 우리집 정원을 이곳의 지명인 부암(付岩)과 같도록 부암정(傅巖亭)이라 이름 지어주었다. 부암(付岩)이라는 문자는 부암(傅巖)과 완전히 똑같은 소리가 난다. 역시 한국인은 그런 종류의 것에 이름을 붙이는데 영리하다.
-윤치호일기 1927.6.17.금.(62세)-

서울집. 오전 10시부터 약 50그루의 단풍나무를 심기 위하여 부암정에 갔다. 약 오후3시에 집에 돌아왔으나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윤치호일기 1933.4.10.월.(68세)-

서울집. 약 오후 2시경 부암정에 가서 4시 15분까지 상쾌한 낮잠을 잤다. 다양한 야생화의 향기로 깨끗하고 신선한 공기를 즐겼다. 특히 ‘보루수’란 꽃은 아주 달콤한 향기를 발산한다. 약 오후 7시에 집에 돌아왔다. 때때로 조금 비가 내린다. 북문 밖의 가로지르는 작은 시내가 깨끗하게 유지된다면 주변경관에 보다 깊은 관심을 끌 수 있을 텐데. 시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긴 도랑의 쓰레기를 한 달에 한두번만 청소해도 좋으련만... 모든 사람은 죽은 쥐로부터 깨진 도자기까지 온갖 종류의 쓰레기를 시내 속으로 던진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부르면, 우리는 매우 화를 내겠지...
-윤치호일기1934.5,21.월.(69세)-


서울부암정 위치도(김영환.2014): 부암정을 중심으로 한 서울의 풍경을 진경산수화적 기법으로 표현했다

부암정은 인왕산 청계동천(靑溪洞天) 아래 자리 잡은, 조선말 관리를 지낸 해평 윤씨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의 별서이다. 윤웅렬은 1906년 한양 도성 안에 성홍열(猩紅熱)이 유행하자 창의문 밖 이곳 부암동에 별서를 만들고 피신하였다. 우선 벽돌로 2층 서양건물을 짓고 1911년 한옥건물을 지어 살림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후원쪽에서 본 부암정 전경경사진 곳에 위치하여 이동시마다 시각적 변화감이 연출 되고 있다.

그는 이곳에 오래 거처하지는 않았지만 부암정을 그의 자녀들과 함께 쉬는 별장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아들 윤치호(尹致昊:1865~1945)는 이곳을 자주 찾아와 시간을 보내며 정원을 가꾸었다. 이러한 사실은 60년 동안 쓴 그의 일기(日記)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위의 나열한 윤치호의 일기는 이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윤웅렬은 호가 반계(磻溪)로 1856년(철종7)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861년 군영의 일을 맡아보는 종2품 벼슬의 공주중군(公州中軍)을 지냈다. 1878년(고종15년) 군국기밀과 일반정치를 총괄하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참사(參事) 및 남양부사(南陽府使)를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개화당내각의 형조판서(刑朝判書)가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능주로 귀양갔고,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개화파가 다시 집권하자 국방부장관격인 군부대신(軍部大臣)을 지냈다.

한편 윤치호(尹致昊: 1865-1946)는 윤웅렬의 장남으로 대를 이어 부암정을 가장 자주 이용했던 인물이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미국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미국에 건너가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을 연달아 졸업하였다. 귀국 후에는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여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치하에서는 교육사업을 하면서 재야에 칩거하였는데 이 무렵 정원과 식물에 대한 애정을 갖고 특별히 부암정을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원에서 본 사랑채와 부암정 테라스(강충세.2013)


안채의 한옥배치(강충세.2013)

윤치호는 일찍이 해외유학을 한 개화선각자로, 그가 귀국한 초기(1903)에는 그의 부친이 살던 정동(貞洞)의 한옥에 관해 심한 불만을 가졌다는 기록이 보인다.(1903년 6월19일자 일기). 그것은 주거환경이 불량하고, 비위생적이라는 점과 주거면적에 비해 방이 지나치게 많고 시끄러워서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정원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이러한 불만이 나중에 윤치호가 부암동 별서(傅巖洞別墅)를 자주 찾게 되었던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윤치호의 일기에 따르면 윤웅렬은 1904년 삼계동(三溪洞)의 대원군 소유의 별장(石波亭)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곳으로 옮겨와 1911년 사망하기까지 지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윤치호의 일기 6권과 7권( 1906년 7월~1915년 12월)사이의 기록이 누락되어 있음으로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윤웅렬은 본시 정동(貞洞)에 본댁을 두고 있었고, 윤치호 역시 신촌(新村)에 분가하여 본제를 두고 있었음으로 이곳은 윤웅렬의 가족이 때때로 휴식차 들리는 도시형 별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치호는 처음엔 이곳을 모친의 문안을 위하여 들렀지만, 모친의 사망 후에는 친구와의 회합이나 가족나들이 여름피서를 위하여 자주 들렀다. 때로는 여름 한철을 아예 이곳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정원에 나무를 새로 심기도 하면서(1928년,1933년기록) 실제적인 작정활동을 하였다. 그는 이곳을 무척 아껴 나무와 돌과 물 등 자연에 관한 깊은 애정이 있었다는 것이 그의 일기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다.


부암정후원(가을강충세. 2013)

부암정은 서울 종로구 부암동 348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데, 가옥은 현재 서울 지방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있다. 또한 이 지역 일대는 인왕산 산록에 해당되며, 원경(遠景)으로는 북악산과 인왕산이 조망되는 경승지이다. 예부터 이 일대는 경치가 좋아 청계동천(靑溪洞天)이라 하였고, 안평대군은 그의 꿈속에서 본 무릉도원을 찾아 이곳에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었다. 실제 국보로 지정 되어있는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는 안평대군의 뜻을 따라 화가 안견이 이곳 일대의 풍광을 소재로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부지의 입구와 후원의 표고차가 최고 18m에 이르는 가파른 지형으로 공간의 구성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눠질 수 있는데, 사랑채와 안채가 있는 건물부지와 바깥마당, 그리고 부지 뒤쪽과 계곡으로 연결되는 후원이 그것이다.


부암정평면도(이재근.1991): 1991년 당시 본인이 부암정 정원의 모습을 측량한 도면이다.


서울부암정도(김영환.2014): 현재 서울 부암정 내원의 모습을 진경산수화적 기법으로 그렸다.

부지를 들어서면 방지가 있는 곳에서 두 개의 동선으로 나눠진다. 하나는 문간채로 이르는 생활동선이고, 다른 하나는 계류로 이르는 원유동선이다. 생활동선은 문간채를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로 갈리는데, 사랑채에 이르면 2층 망루에 올라 창문을 통해 사방의 서로 다른 경관을 조망하게 되는 극적인 시각체험을 할 수 있다. 안채를 돌아 후원에 이르면 사방이 위요되고 화목류로 장식된 안온한 시각경험을 얻게 된다. 이곳의 한옥은 전형적인 서울경기 지방의 양식으로 행랑채, 사랑채에 ‘ㄴ’자형의 안채가 연결되어있다. 건물의 가장 특이한 점은 역시 사랑채 뒤편에 연결된 망루형 2층 부암정으로, 형태나 재료에 있어서 중국풍의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사랑채와 부암정 근경


부암정과 연결 테라스 근경(강충세.2013)

수경요소로는 계류와 방지가 있다. 계류는 부지의 남쪽에서 동쪽을 돌아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현재의 계류와 북쪽담장을 따라 동서방향으로 흘러내린 계류가 현재의 대문 앞에서 만나고 있음으로 부지의 3면이 계류로 감싸인 형태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거북모양의 조형물적 요소를 갖춘 바위가 있고, 전면에 중도가 있는 방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중도가 없어졌고 연못도 다소 변형된 채로 유지되고 있다.


부암정 연못과 측면정원

본래는 정원의 경계를 구획하는 담장 없이 계류에 의해 출입구가 구분되어 징검다리를 통해 건너 다녔고 안채 주변에만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는데, 지금은 사유지여서 ‘ㄱ’자형으로 전면이 모두 담장으로 둘러쳐져 들어가 보기 어려운 점은 아쉽다.

현재 이곳에서의 인공적인 점경물은 발견되지 않는다. 현존하는 수목 중에 화목류는 왕벚나무, 앵도, 보리수 등이 있으나 과거에는 목련과 단풍나무 등 더 많은 수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식 상으로는 문간채 앞쪽에 오동나무와 은행나무의 거목이 건물을 압도하고 있었다. 양쪽 담장으로는 측백과 일본잎갈 나무, 소나무와 같은 상록수로 외부공간의 경계를 구분 짓는 한편, 방지주변과 후원에는 화목류를 위주로 하여 부드러운 인상을 갖게 하고 있다.

방지는 원래 가운데 작으마한 섬을 두고 있었으며, 수량이 풍부하였다. 이것은 자연성이 강한 인공 환경에서 가장 인공적인 정원요소가 되고 있으며, 신선사상(神仙思想)을 나타내는 전통정원요소(傳統庭園要素)라고 할 수 있다.


부암정의 전정(여름)

집의 후원에는 화계를 두지 않고 석축을 쌓았다. 이는 지형 상 경사가 급하고 암반이 드러나는 등 물리적 제약조건이 있기 때문에 넓은 평지를 얻어 잔디를 깔고 야외생활을 즐기려 했던 작정자의 서구적 사고가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 부암정의 외원(김영환.2014): 부암정을 중심으로 하는 외원의 모습을 진경산수화 적 기법으로 표현했다.


부암정은 해방이후 어느 순간부터 주인들이 바뀌었고, 바뀐 주인들이 살지도 않아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문화재에 애정이 깊은 한 예술인이 인수하면서 대대적인 보수정비를 하였다. 아무리 뜻이 좋고 역사가 있어도 이것을 애정을 가지고 보수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대상지가 된다. 그러나 안목이 있는 새 주인은 역사성도 살리면서 살기 편안한 별서처로 꾸며 놓았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사멸되어버릴 위기에 있던 별서터를 새 주인은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켰으니 문화유산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다소 쌀쌀하기까지 한 2013년 늦가을이었다. 사전 허락절차를 받고 학생들 40명을 대동하고 간 것이었는데 새 주인이 계시지 않아 관리인의 안내를 받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주인은 외출하기 전 떡방아집에 떡과 다식을 주문하여 그 많은 학생들을 따뜻한 차와 함께 들고 가도록 배려했다. 새주인은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애정도 있지만, 젊은이들을 위하고 손님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인간적인 분이셨던 것이다. 지면을 통해서나마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부암정을 지금처럼 소중하게 관리하면서 후손에게 잘 물려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부암정은 현재 개인 사유지인 관계로 자세한 내부사정에 대해서는 최근에 이곳에 다녀온 나의 친구의 글을 소개하면서 마칠까 한다.   

“쇄락하기 그지없던 조선말기 윤웅렬 가의 별서를 인수한 새주인은 자료도 찾고 고증도 해가면서 5년이란 기간이 걸려 이곳 별서를 개조하였다. 예술적 안목을 살려 외관은 그대로 살리면서 내부는 살기에 불편하지 않게 개량하였다. 천장은 따로 없이 서까래만 보이고 냉난방 시설이 있으나 여름에 바람을 맞이하기 위해 모시로 방충망을 만들고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견고한 이중창문을 한옥에 어울리게 만들어 붙였다.  


안채문안에서 본 바깥외원(강충세.2013)

이 집은 특히 독특하게 건넌방에 덧문을 단 누마루 반 칸이 돌출되어 있어 바깥경치를 내다볼 수 있게 하였다. 양옥2층은 옛날부터 부암정의 역할을 한 누각이 있던 자리로서 테라스 누각을 만들어 주인의 서재로 꾸며놓았다. 서너 평 남짓한 공간으로 위로는 북악산과 인왕산이 보이고, 옆 계곡에는 개울물이 흐르며, 아래로는 한옥 세 채의 기와지붕이 기하학 구도를 이루고 있다. 건물 오른쪽으로는 아름다운 계곡과 산책로가 있다. 대문과 중문에서 이어진 돌담은 계곡 앞에서 끊어져 마치 담양의 소쇄원을 연상하게 한다. 제법 큰 개울 주위를 바윗돌과 단풍, 소나무 등이 둘러싸고 있고, 계곡 위와 아래에 각각 아담한 돌다리를 만들었다. 개울을 건너 나지막이 올라가면 산책로에 수국을 줄지어 심어놓았고,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나무사이 두 곳에 널찍한 평상을 만들어 놓았다. 무더운 여름에 친구들과 앉아 수박파티를 하면 적격이겠다.”


사랑채측면 외원
연재필자 _ 이재근 교수  ·  상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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