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노벨상을 받은 정원사를 아십니까? - 2

김태경 논설위원(강릉원주대 교수)
라펜트l김태경 교수l기사입력2018-07-22
노벨상을 받은 정원사를 아십니까? - 2


_김태경(강릉원주대 교수)

 

27세. 가이엔호펜(독일)
42세. 몬타뇰라(스위스) ‘카사카무치’
53세. 몬타뇰라 ‘카사로사’
66세. 티치노의 루가노
이들은 정원사 헤세가 살았던 곳 혹은 함께 했던 주택들이다.

그저 문학의 거장 한 분이 정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혹은 당시의 일반적인 생활패턴일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를 정원과 연관 지어 표현하는 글과 사진 그리고 그림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정원을 가꾸는 모습의 사진은 인터넷에 널려 있고, 독일의 시사주간지인 <슈피겔>에 실린 그의 사진에는 ‘정원의 푸른 나무 그늘 속에서’라는 설명뿐만 아니라 ‘채소밭의 헤르만 헤세’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기도 하였다. 한때 그러한 <슈피겔>의 태도를 두고 “왜 보잘 것 없는 정원사의 즐거움을 다루는가?”, “세계문학의 국제적 경쟁에서 제외된 작가를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인가!”라는 등 그를 마치 세상을 등지고 정원에만 몰두하는 자연인(?) 취급을 했던 글도 있다. 분명 헤세는 자타가 공인하는 정원사였고 바쁜 정원의 일상 속에서도 자신의 근본인 문학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음은 물론 그런 비판이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니 정원에서의 시간이 대작을 싹틔우는 과정이었던 것에 틀림없다.


나는 이제 내 소유의 정원 안에서 자란 과일과 채소를 보며 마음의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세상에 대한 동경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헤세는 정원사를 두고 ‘자연의 의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약간의 자유를 사용하는 직업’이라 했을 정도로 자신만의 분명한 철학이 있었다. 정원을 아무렇지 않게 삶의 중심에 놓게 했던 그의 태도는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늘 정원을 가꾸던 아버지의 그림자를 그늘로 삼았던 그에게 집밖의 공간은 불편하거나 낯설고 두려운 곳이 아니라 숨 쉬는 공기만큼이나 일체화된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게 된 초기부터 정원과의 인연의 끈을 붙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남을 낳기 이전까지의 정원은 소유가 아닌 희망의 대상이었을 뿐이고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 희망이 현실로 된 것은 조금 지난 30세가 되어서였다. 40대의 근거지였던 몬타뇰라의 카사카무치도 정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50대에 들어선 1930년이 자신을 정원사라고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해였을 것이다. 친구들과 농담처럼 이야기하던 중에 꿈에도 그리던 정원 딸린 집을 평생임대로 얻게 됨으로써 정원이 그저 관찰과 그림의 대상에서 경작과 재배를 통한 행복의 대상으로 현실화된 것이다. 산가시울타리로 경계를 두르고 안에는 샘물과 채소밭을 만들어 먹거리를 해결하였으며 무화과나무와 복숭아나무는 식사를 마친 거장에게 후식으로 제공되지 않았을까?

헤세의 정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의 정원을 들여다보면 학생들에게 정원 설계 수업을 하면 빠지지 않고 늘 등장하는 ‘4계절 정원’이 그려진다.


봄 - 패튜니아, 살칼퀴꽃, 붉은오랑캐, 양귀비
여름 – 패랭이, 과꽃, 산나리, 참제비고깔, 달리아, 당아욱, 카네이션, 해바라기, 니겔라
가을 – 과꽃, 당아욱, 해바라기, 샤프란덩굴

계획에 의한 식재로 볼 근거는 찾을 수 없지만 자줏빛을 매우 좋아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백일홍을 특별히 좋아했다는 점이다. 다양한 칼라와 오랜 생명력에 특별한 매력을 느꼈다고 하는데 나 또한 깊은 동감을 표하고 싶다.


나는 현란한 빛깔, 환호하듯 강렬한 색깔, 진하디 진한 노란색과 오렌지색, 웃음을 터뜨리는 듯 쾌활한 빨간색과 경이로운 자줏빛... 어떻게 하든 이 색들은 황홀하도록 아름답고 강렬하게 빛날 뿐만 아니라 서로 잘 어울린다.

물론 다양한 식물종으로 보아 생명력이 짧거나 단순한 색채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 테고... 지금도 똑같은 식물재료를 이용해서 식재설계를 해봐도 재미있을 듯하다. 당연히 초화류만으로 아름다운 정원이 될 수는 없을 터, 그들의 상층부에는 우리들에게도 낯익은 수목이 자리하고 있다.

관목 – 뽕나무 무화과 산가시나무 포도(덩굴) 종려(관엽)
교목 – 동백나무 주목 수양버들 목련 복숭아나무
이 가운데 유실수가 여러 종 포함된 것이 눈에 들어오는데, 지난번에도 언급했듯이 포도는 그의 삶 한 귀퉁이를 지탱해주었던 중요한 식물이다. 복숭아나무의 죽음을 두고 깊은 슬픔에 잠겼던 경험도 있었다고 하니 유실수는 백일홍에 견줄 수 있던 수목이 아니었을까?


과잉보호를 받아왔던 귀족같은 느낌... 오랜 친구로 생각했던 복숭아나무가 죽었다. 나무의 죽음으로 작은 구덩이가 생겼고, 그곳에는 공허함과 어둠, 죽음과 공포가 기웃거렸다... 이제는 가지나 열매 그리고 나무의 옅은 그늘 속 휴식도 없으리라.

유실수와 더불어 완두콩과 강낭콩, 양배추, 당근, 파슬리, 토마토, 딸기 등을 생산해내던 키친 가든은 헤세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고 그의 건강을 지켜주었을 것이다. 생활의 한 축이 되었던 정원에서 어느 날은 식물학자와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저녁에 그날 모은 잎사귀들을 자신의 서류철 안에 넣고는 자신이 보존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적음에 슬픔을 느꼈다고 하니 시간만 더 허락했다면 또 하나의 직업을 가질 수도 있었으리라. 그것이 식물분류의 형태로 정리되지는 않아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그 아쉬움 때문에 화가라는 또 다른 직업에 애착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앞에서의 모습들은 헤세였기에 더 특별하고 그의 정원이었기에 멋진 그림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원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적인 정경일지도 모른다. 그것만을 써내려 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음 회에는 헤세가 정원에서 보냈던 어느 하루를 그려보고 그가 평론가들에게 모진 비판을 받아가면서도 정원을 통해 얻었던 인생의 철학에 대해 이어가려 한다.
_ 김태경 교수  ·  강릉원주대학교 환경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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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kkim@gw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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