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글_진승범 논설위원(이우환경디자인(주) 대표)
진승범 대표이사-이우환경디자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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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펜트l기사입력2019-01-20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글_진승범 대표(이우환경디자인(주))



오래전 필자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영어 수업이었는지 다른 과목이었는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으나 서양의 속담이나 격언을 조사하는 과제가 있어 이를 준비하던 중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격언이 하나 있었다. 모두 익히 잘 알고 있는 ‘새 술은 새 부대에(New wine must be put into fresh wineskins)’라는 격언이 어린 필자의 머릿속을 헷갈리게 하는 것이었다. 술을 ‘부대(wineskin)’에 담는다? 당연히 술은 ‘병(bottle)’에 담아야하는 것인데, 하다못해 ‘주전자(pot)’도 아니고(그 당시엔 막걸리는 주전자에 담아 마셨다) ‘부대’라니?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궁금한 것을 그냥 두고는 못 견디는 성격 탓에 이리저리 연원(?)을 추적하여 보니 그 이유인즉슨 이러했다.

이 격언이 회자(膾炙)되고 기록될 당시(성경에도 이런 글귀가 있다 하니 매우 오래전부터 쓰였던가 보다)에는 유리로 구슬 같은 장신구는 만들었으나 무엇을 담는 병과 같은 용기(容器)를 만들어 사용하지는 못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양(羊)의 가죽(skin)으로 만든 부대(bag)에 술을 담아 보관하거나 휴대하였다고 한다. 그때 완전히 발효되지 않아 아직 당분이 많이 남아 있는 새 술은 발효성이 매우 강해 여러 번 사용하여 가죽의 신축성이 떨어지고 이음새가 견고하지 않은 헌 부대에 넣을 경우 발효시 팽창력에 의해 부대를 터지게 하여 결국 술도 버리고 부대도 망가져 못쓰게 하므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 보관하라는 격언이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그때 어린 필자가 가진 생각은 유리병의 발명이 좀더 빨랐더라면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격언은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구나 라는 것이었다. 유리병은 깨지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깨끗이 씻어 재사용이 가능한 용기이므로.

이렇듯 속담이나 격언이 무조건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교훈이나 귀감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요즘도 하게 된다. 물론 대부분의 좋은 말씀은 예로부터 우리를 일깨우지만 시대상황이 변하면 속담이나 격언도 변하는 것이다. 좋은 의미든 그렇지 않은 의미든. 지금 2, 30대 젊은이들에게 ‘개천에서 용 난다’거나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을 조언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들의 비난과 분노에 찬 반응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 분명하다. 

시대가 변하면 속담(격언)도 변한다. 지금은 술을 부대에 담는 시대가 아니다. 어디에 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술의 질) 담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대통령 집무실 이전 사실상 무산’이라는 제호의 뉴스를 접하고 아쉬움은 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 집무실 이전은 (집권에 실패했던)2012년 대선에서부터 주요 공약의 하나였다. 지금의 대통령이 노무현 정부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할 때부터 그려왔던 구상이라는 기사까지 있는 걸 보면 10년도 넘게 생각한 계획이라는 얘기다. 2017년 대선 때도 공약 1호가 ‘집무실 광화문 이전,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드린다’였다. 그러나 집권 후 이를 추진하기 위해 위촉했던 유홍준 광화문 대통령 시대위원회 자문위원이 지난 4일 기자회견을 열어 현 청와대의 기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체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어 현 임기내 추진이 아닌 ‘장기적 사업’으로 검토할 것이라며 사실상 추진 불가를 표명하였다. 대선 공약 1호를 포기한 것이다. 사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내용적으로는 의미와 당위성이 꽤 담겨있다. 즉, 청와대의 개방은 경복궁-청와대-북악산을 연결시켜 청와대의 광화문이 아닌 광화문을 청와대 안으로 끌어들이는 확장개념으로서 매우 매력적인 구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매력있는 사업을 탈원전이나 최저임금 등 여기저기서 불만과 아우성이 적지 않음에도 일사불란하게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던 청와대가 집권 후 2년 가까이 심사숙고(?)하더니 결국 슬그머니 내려놓는 것을 보면 그만큼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일이 만만찮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아니면 10년 넘게 한 구상이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집권세력 내부에 이에 따른 이해득실이 개입되었거나, 평소에는 별 고민 안 하다가 선거 때가 되니 습관적으로 던져본 것일지도 모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사실 청와대를 개방하거나 없애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는 정치적 구호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나오던 수사였다. 박근혜 대통령만 빼고) 만약 그렇다면 유리병의 시대에 술의 질을 높이는 데 힘쓰기보다는 (실패한)부대 바꾸기에 세월을 허비한 것이니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홍준 자문위원의 회견 내용 중에 “관저를 옮기는 데 제일 큰 걸림돌은 현 대통령만 살다가 가는 집이 아니”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하며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 말은 대통령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선출에 의해서든 지명에 의해서든 한정된 임기를 갖고 한 지역이나 집단의 업무를 총괄하는 전국의 크고 작은 모든 단체의 장들이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이 필요한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전에 진정으로 그 조직의 미래를 생각하는 리더라면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 있다. 정말 좋은 새 술을 빚고 있는가? 새 부대는 진실로 새롭고 튼튼한 것인가? 이 부대 바꾸기는 과연 조직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고 지속가능한 플랜인가? 이 일에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개입되지는 않았는가?

어김없이 새 해를 맞았다. 해마다 첫 번째 책은 고전(古典)을 읽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인생의 참뜻과 지혜로운 삶의 자세를 알려주기 때문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인생 지침서’라는 명(明)나라 문인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菜根譚)>을 읽다가 눈에 밟히는 구절이 있어 소개하며 졸고를 마친다.

‘권세와 명예, 부귀영화를 가까이하지 않는 이도 청렴결백하지만 가까이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이 더욱 고결한 사람이다. 권모술수를 모르는 이도 뛰어나지만, 쓸 줄 알면서도 쓰지 않는 사람이 더욱 뛰어난 사람이다.’
_ 진승범 대표이사  ·  이우환경디자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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