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공간은 어떻게 장소화 되는가

공간과 장소(Space and Place)
라펜트l오정학 박사l기사입력2015-10-07

공간은 어떻게 장소화 되는가



공간과 장소(Space and Place)
이-푸 투안 지음, 구동회⋅심승희 옮김, 도서출판 대윤 펴냄(2007)

오정학  경기도시공사(ohjhak@daum.net)




도시국가였던 로마는 포에니 전쟁에 이긴 뒤 제국으로 발돋움한다. 세 번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전쟁은 지중해의 패권을 다툰 세계대전이었다. 점령자 로마군에 바쳐진 카르타고 시민의 청원서가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신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의 오래된 도시를 위해 거룩한 영광과 전세계에 떨친 이름을 위해, 당신들에게 간청합니다...우리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면...도시의 중심부를, 포럼을 남겨 주십시오. 우리 마을을 관장하는 신들을 남겨주십시오...(242~243쪽).” 그러나 점령군은 잔인했다. 애원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무자비하고도 철저히 파괴되었다. 로마군은 나무와 풀까지 불사른 뒤 소금을 뿌려 아예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 버렸다. 


서구 사회가 탈레반의 유적지 파괴를 비난하지만 그들의 과거도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점령자들의 신상 훼손과 성지 파괴가 이어지는 것은 단순한 복수나 재미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장소를 없앰으로써 피정복민의 신을 빼앗아 버리는 의도가 담겨있다. 상대의 정신문화를 무너뜨리고 정복자 중심의 지배문화가 강요된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전통마을에 있던 토속신전과 무속을 말살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일제는 그 과정에서 문명과 비문명, 근대와 전근대, 신민과 2등 신민, 인간과 비인간으로 서로를 구분했다. “신상을 모신 성지를 파괴하는 것은 도시의 정당성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삶의 기준이 되었던 규칙, 의례, 제도는 모두 신의 재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242쪽).” 이처럼 신화적 공간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장소를 이루는 핵심적 경로였다.   


공간계획에 있어 장소성은 중요시된다. 아니 계획분야를 넘어 예술적 창작 전반에 걸쳐 장소성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테면, ‘문학에서의 장소의식은 기억이 매개된 실존적 장소이자 역사적 장소로 인식되며, 서사장르와 서정장르에서 장소가 지닌 실존성과 역사성은 각기 형상화된다(문학평론가 이명원).’고 평가될 정도이다. 그러나 장소에 대한 태도는 개인과 사회마다 다르다. 공간을 이루는 상이한 풍토적 조건은 개인적 감각기를 차별화시키고 사회적으로는 문화와 신화의 차이를 부른다. 어떤 개인이든 문화권이든 장소에 대한 애착은 순간적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경험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공간과 삶의 여정에서 경험된 시간은 비교될 수 없으며, 장소에 대한 감정 반응을 다르게 유발시킨다. 그 결과 결국 장소의 친밀함과 애착에는 인류적 보편성과 풍토적 차별성이 동시에 반영된다. 


어떻게 장소는 정체성과 아우라를 갖는가? 한적하고 오래된 고택이다. 그러나, 양산보, 정철, 송순, 김인후 등 조선의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 저곳에서 학문과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달라져 보이지 않는가? 갑자기 공간은 색다른 언어를 구사하고 주변은 하나의 완전한 세계가 된다. 남도여행길잡이(www.namdokorea.com)


누구나 공간 속에서 살며 장소를 추억한다. 소쇄원은 사화를 피해 낙향한 양산보의 은둔지였다. 몸은 이곳에 두었지만 바깥세상을 완전히 잊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장소는 안전을 공간은 자유를 의미한다. 즉 우리는 장소에 고착되어 있으면서 공간을 열망한다. 공간과 장소는 생활세계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이다(15쪽).” 투안은 이렇게 추상적이고 막연한 ‘공간’과 체험을 통해 의미가 부여되는 ‘장소’를 뚜렷이 구분한다. 투안과 함께 현상학에 토대를 둔 인본주의 지리학의 대표 학자로는 에드워드 렐프가 꼽힌다. <장소와 장소상실>에서 렐프는 장소를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가 융합된 것”이라고 보고, 장소의 타자지향성, 장소의 획일성과 표준화, 몰양식의 장소, 인간적 스케일과 질서의 결핍, 장소의 일시성과 불안정성을 무장소성이 표출되는 형태로 분류했다. 반면, <토포필리아>에서 인간이 장소에 대해 갖는 태도에 천착했던 투안은 <공간과 장소>에서 공간과 장소의 관계와 차이, 각각의 속성, 인간이 공간과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조직하는 방식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장소란 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장소는 정체성과 아우라를 갖는가?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 책은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고 이해하는가에 초점을 둔다. <공간과 장소>의 열쇳말은 ‘경험’이다. 오랫동안 어떤 장소 속에 있으면 그 곳이 친밀해지고 그 장소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예를 들면 오래된 점포주들은 자신이 가게와 주변상권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는 절대로 그 가게의 문제점들을 제대로 집어낼 수 없다. 그에게는 너무 익숙하고 친밀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타자적으로 그 장소를 볼 때 비로소 가능하다. 어떤 곳에 대해 냉철한 이성으로, 그리고 모든 감각을 통해 경험할 때 그 대상과 장소는 구체적인 현실성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_ 오정학 박사  ·  경기도시공사 사업기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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