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중국 원림의 다양한 경관

『원림』 러우칭씨
라펜트l오정학 과장l기사입력2016-07-07
중국 원림의 다양한 경관


원림
러우칭씨 지음, 한민영, 이재근, 신상섭, 안계복, 홍형순, 이원호 옮김, 도서출판 대가(2008)
오정학 경기도시공사(ohjhak@daum.net)


중국의 궁원은 무척 넓다. 진시황(B.C.259~210)의 아방궁은 특히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실재 했는지는 불명확하다. 아방궁이 석 달 동안 불에 탔다지만(17쪽), 그 근거로 알려진 『사기』에는 위하 이남의 아방궁이 아닌 ‘함양’의 궁으로만 기술되어 있다. 2002년부터 5년간 이루어진 중국 지방 정부의 공식 발굴에서 토대 외 어떤 흔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기(B.C.91)』 외 다른 역사적 기록도 없다. 후대의 시인 두목(803~852)과 같은 여러 문인들의 시나 상상화 등만 전해져 올 뿐인데 이를 객관적 사료로 보기는 힘들다. 이 때문에 2천년대에 들어와 그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역사학계에서도 늘고 있다. 진시황은 현대 중국인들에게 모택동과 함께 최고의 역사적 인물로 손꼽힌다. 결국 아방궁 이야기는 이러한 진시황의 신화적 이미지에 중국인 특유의 과장이 덧칠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든다.

기록상 나타나는 중국 궁원의 원형(原形)은 상림원이다. 상림원은 진시황 이전인 진 소왕 때부터 있었던 것을 한 무제가 대폭 확장하였다. 그 결과 둘레130~160km에 12개 궁전과 150만㎡의 곤명지가 만들어졌다. 이 곤명지에서 수군이 훈련을 했다 하니 엄청난 규모이다. 그러다가 당나라 때에 이르면 궁원의 크기는 줄어들어 장안성의 삼원(금원, 동내원, 서내원) 중 하나였던 금원(禁苑)은 동서가 10km, 남북이 9km정도였다. 

그런데 한나라 때의 상림원은 엄밀히 따지면 후대의 궁원(정원식 원림)과는 좀 다른 유형이다. 우선 위치가 궁궐과 붙어있지 않고 떨어져 있었다. 기능면에서도 황제의 위락과 수렵활동 뿐 아니라 관노비와 빈민들을 이주시켜 경작활동과 황실용 물품생산을 했다. 그 외 근위군 주둔지의 역할도 있었다. 이는 상림원이 단순히 황제의 여가공간이 아니라 도성경영을 위한 다목적 공간이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이 때문에 상림원을 궁원이 아닌 ‘성원체계(城苑體系)’로 지칭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소위 황가원림으로 불리는 중국의 궁원은 이처럼 사냥과 제례, 식물원, 근위병 주둔 등을 위해 넓은 면적을 자랑했다. 그러나 궁원조영의 사상적 배경은 우리의 전통궁원과 많이 겹친다. 지리적으로 붙어 있고 동일한 문화권이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봉래, 방장, 영주로 대표되는 신선사상이 대표적인데, 상림원 내 태액지에서 그 원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의 후세 사가원림에도 큰 영향을 미쳐 일지삼산(一池三山)의 원칙으로 굳어졌다. 


승덕 피서산장. 열하행궁(熱河行宮)이라 불렀던 현존하는 최대의 황가원림으로 1707~1790년에 조성되었다. 몽골에 대한 경계를 위해 북경 북동쪽에 조성한 뒤 황제와 수천명의 수행단이 매년 여름에 이곳에서 사냥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Lafent

정원의 주재료인 식물을 보자. 연꽃, 소나무, 대나무, 매화가 많이 보인다. 한중 두 나라의 정원에서 모두 특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들이다. 이 식물들은 회화의 소재로도 폭넓게 애용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유교문화를 매개로 이들 식물이 양국의 정원에서 모두 선비의 지조와 절개, 기개, 순결함 등을 상징해 왔음을 알려준다. 오랜 기간 두 나라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문화 때문에 지배계층의 상당수가 문인들이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중국의 원림은 좀 더 회화적인 색채가 진하다. 대표적으로 하얀 담과 동창 등을 들 수 있다. 원림의 흰 담은 캔버스가 되어 전면의 식물을 담고 있는데 특히 빛의 작용에 의한 그림자가 덧붙여지면 흡사 한 폭의 동양화와 같은 느낌을 받는다. 사람의 시선과 시야를 창밖의 특정 대상물로 한정시키는 동창(洞窓)이나 동문(洞門)도 마찬가지이다. 동창을 통해 보는 창문 너머의 경관은 아름다운 액자를 보는 듯하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경관에 대한 양국의 시각에 일정한 차이가 있음을 드러낸다. 러우칭씨가 원림의 경관을 정적경관과 동적경관으로 뚜렷이 구분한 것은 그 이유의 하나이다. 멈추어서 보는 경관 뿐 아니라 걸어가면서 볼 수 있는 동적경관에 대한 관심은 곡선회랑, 홍교, 지그재그식 석교에서 보듯이 계속적인 시각의 변화를 꾀한다. 

러우칭씨의 <원림>은 넓은 중국대륙의 원림문화를 명청시대에 초점을 맞추어 황가원림과 사가원림으로 나누어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사실 원림문화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기에 자칫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럼에도 <원림>은 짧은 분량 속에서 시대별, 지역별, 유형별로 체계적인 전달을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가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한 것에는 감수자로 참여한 이재근, 신상섭, 안계복, 홍형순, 이원호의 역할이 느껴진다. 덕분에 폭넓은 내용을 압축적으로 전달하고 있음에도 다른 번역서에서 느꼈던 혼란과 산만함이 전혀 없었다. 중국 원림서의 번역작업에 국내 조경전문가들의 계속적인 참여를 기대해 본다. 
_ 오정학 과장  ·  경기도시공사 사업기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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