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중세의 실용정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 지음
라펜트l오정학 과장l기사입력2016-12-07
중세의 실용정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 지음, 나무도시 펴냄(2011)
오정학 경기도시공사 과장 (ohjhak@daum.net)



유럽의 봄은 정원박람회 준비로 분주하다. 영국의 첼시, 프랑스의 쇼몽, 네델란드의 쾨켄호프 등 여기저기서 정원박람회를 만날 수 있다. 정원이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대중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몇몇 단체들과 기관에서 정원문화 확산에 안간힘을 쓰는 한국과 많이 다른 풍경이다. 

로버트 포그 해리슨은 <정원을 말하다>에서 정원의 정치성을 언급하며 공동체를 위하는 ‘행위(action)’의 역할에 주목했다. 그러나 유한계급의 과시적 공간이었던 유럽 정원사를 생각해보면 무조건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슈바이처와 월터 파머-짐바브웨 황게국립공원의 사자 도살자-를 생각해 보자. 똑같은 서구의 의사가 아프리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한 활동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행위에 깃든 정치성은 너무나도 달랐다. 가드닝의 정치성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행위의 주체인 인간의 문제일 것이다.  

정원활동은 취향의 영역이다. 취향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부르디외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취향에 있어서 선천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철저히 후천적인 교육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 정원문화가 한국과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마냥 부러워하거나 모방의 대상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또 하나의 식민주의적 문화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경로로 오늘날의 유럽 정원문화가 만들어졌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유럽 정원사를 살펴보자. 근세에 프랑스의 정형식 정원과 영국의 풍경식 정원이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피렌체에서 13세기부터 빌라 정원이 발달했다. 피렌체는 이태리 르네상스의 발상지였기에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발달이 정원문화의 발달조건임을 알 수 있다.  

그럼 르네상스 이전에는 어떠한 정원이 있었을까? 아쉽게도 고정희는 “삼 년 동안 부단히 찾아다녔지만 중세의 정원은 어디에도 없었다”고 미리 밝힌다. 이 말은 두 가지를 뜻한다. 정원에 대한 현재와 중세의 개념에 차이가 있다는 것과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 힘든 정원의 속성을 말한다. 그 때문에 현대인이 생각하는 정원은 중세에 없었고, 그나마 비슷하게 남아있는 것도 오리지널이 아닌 복제품이라는 것이다. 건축물 같은 인공구조물도 세월의 힘을 이겨내기 힘든데 하물며 식물 중심의 정원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고정희가 주목한 중세정원의 출발은 ‘실용정원’ 이다. 정원이 감상 위주의 취미 여가공간이 된 것은 중세 이후이며, 그 전에는 생활에 도움을 얻는 실용공간의 의미가 더 컸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것은 유럽 뿐 아니라 동서양의 공통된 특성으로 보여 진다. 생필품을 화폐로 가게에서 사는 것은 사실 근대적 개념이다. 과거로 갈수록 생산력이 낮고 상업이 발달되지 않아 물물교환과 자급자족의 비중이 컸다. 채소 등의 간단한 먹을거리는 스스로 재배해야 했을 터이므로 정원은 텃밭을 포괄하는 개념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6세기 후반에 지어진 이태리 밀라노의 산 심플리치아노(San Simpliciano) 수도원의 회랑정원  ⓒcommons.wikimedia.org

근대 인간이성이 발달하기 이전의 종교는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서양에서 그 힘은 한층 더 컸다. 동양과 달리 유일신을 유럽 전체가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종교 공간인 수도원은 중세 문화의 표본으로 볼 수 있다. 수도원은 종교뿐 아니라 교육과 의료의 기능도 하였기에 동아시아의 불교 사찰보다 더 큰 동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이었다. 특히 채소원과 약초원은 수도원의 필수 생활시설로서 외곽에 배치되었다. 

그에 비해 수도원 안에서 종교적인 상징성을 갖는 공간인 파라다이스와 클로이스터는 중정 형태로 배치되었다. 두 공간은 모두 사분원의 형태였고 중앙에 수경을 갖추고 있었다. 파라다이스는 성당에 속하고 클로이스터는 수도원에 속한 공간으로 구분된다. 파라다이스와 클로이스터는 원래 정원으로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후대로 갈수록 감상 및 휴게 공간으로 바뀌어  정원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초본원과 약초원도 점점 그 실용적 필요성이 줄어듦에 따라 감상을 위한 식재가 많아지면서 정원의 형태로 바뀌어 갔다. 

수도원이 종교·문화적 공간이라면 도시방어 목적의 성곽은 중세 도시계획의 산물이었다. 유사시 방어를 염두에 둔 폐쇄공간이었으므로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자급자족을 위한 초본원과 약초원이 필요했다. 한정된 공간을 활용한 화단과 미로정원이 있었고, 겹으로 축성된 성곽 사이와 같은 유휴지를 중심으로 식물들이 배치되기도 했다. 

이처럼 중세 유럽정원은 자급자족용 실용원에서 감상과 휴식, 여가활동을 위한 정원으로 점차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생산력 향상과 상업 발달이 있었다. 수도원에서 생산활동의 필요성이 없게 됨에 따라 실용원은 점차 감상원으로 바뀌어갔다. 감상 위주의 오늘날 유럽 정원 문화는 시민계급까지 생산의 압박에서 벗어나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된 경제·문화적 발달의 결과이다. 정원문화는 산업구조와 경제활동, 정원을 포괄하는 주거시설, 주거구성원 등의 종속변수로써, 이들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 왔음을 알 수 있다. 
_ 오정학 과장  ·  경기도시공사 사업기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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