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공원_ 공유하는 일상: 우리 도시의 진화하는 공원(下)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_2회
라펜트l안명준 조경비평가, 박상백 기자l기사입력2013-02-01

경공환장(景空環場):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02공원_ 공유하는 일상: 우리 도시의 진화하는 공원(下)

 

공원의 확장: 도시적 기능의 변화

1850년대 이후로 서구의 공원은 도시의 성장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처음 공원은 유희시설 성격의유원지(Pleasure Ground)’로 작용하였고, 1900년대로 들어서면서는 도시를 재설정하는개량공원(Reform Park)’로 기능하게 된다.

 

1930년대를 지나면서는 시민들의 여가생활을 지원하는레크레이션 시설(Recreation Facility)’로 주목받았으며, 1960년대 이후에서야 도시의공원녹지체계(Open Space System)’로 개념과 기능을 확립되게 된다.

 

1990년대 이후에는 환경문제와 지속가능성이 고민되면서지속가능한 공원(Sustainable Park)’의 면모가 강조되고 있다. 최근에는 그린스트럭쳐, 라지파크(대형공원), 문화적 자연과 단계별 진화가 강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공원은 어떨까? ‘공원(公園)’이라는 말부터 일본에서 수입되었는데, 메이지유신 초기 ‘Public Garden’을 번역하면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퍼블릭 파크의 번역이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Park’무엇인가를 수용하는 빈 땅(空地)’이라는 개념에 가까운데, 대체로수렵을 위해 동물을 가두어 기르도록 울타리친다는 의미로 유()와 비슷한 개념이기도 하다.

 

초기 공원은 1888년의 인천 만국공원(또는 각국공원, 지금의 자유공원)으로 외국인이 관리하던소요하기 위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후 우리 손으로 만든 서구식 공원으로는 독립협회에서 조성한 독립공원이 있다. 독립공원은 서재필 등이 파리의 개선문 같은 서구 문명을 이식한 것으로 휴게 장소이면서산업도시의 문명시설이자사회계몽 시설로 개화용 도구이자 계몽용 시설로 처음 선보였다. 홀로서기 공원으로서 독립공원은 독립협회 주도이기는 했으나 시민들의 성금으로, 즉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버큰헤드파크(Birkenhead Park)와 비교해봄직 하다.

 

이후 아픈 역사를 거치며 공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줄어들게 된다. 어느 정도 나라 살림을 추스른 이후 도시계획법이 1962년 제정되면서 도시 공원에 대한 체계가 다시 시작되게 된다. 대략 2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의 생활패턴이 달라지고 급기야 도시공원법이 1980년 별도로 분리제정되기에 이른다. 도시의 자연 공간에 대한 논의가 다양해지면서 2005년에는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로 확대 재편되면서 지금에 이른다.

 

그러나 경제와 문화가 성장하고 도시의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우리에게 공원은 여전히 기계의 부품처럼 작용한다. 그러다보니 일상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기계이다보니 끊임없이 보수하고 정비해줘야 하는 도시공간이 되어버렸다. 자연물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원처럼 자연의 자생성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기능이라는 공원만이 가진 부품성이 여전한 것이다.

 

하지만 공원을 탄생시킨 힘이 시민에게 시작되었듯 새천년에 우리 공원을 시민들은 부품이 아닌 공원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공원이 도시의 것이 아니라 시민의 것임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현대 공원의 진화는 또다시 시민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우리 시대에는 시민들이 직접 다양한 방식으로 공원 내의 정원사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공원이 이미 시민들의 손에서 가꾸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공원이 시설에서 문화의 장으로, 모두가 공유하는 도시 공간이자 공공재로 진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정원사가 되어 시민들이 공원으로 돌아온 것이다."

 

공원의 현재: 시설에서 문화로

아쉽지만 현대 공원은 공공의 정원이 아니다. 공원에서 활동하는 자발적인 정원사(Gardener)를 우리는 볼 수 없다. 전지가위를 들고 우리집 앞 공원의 나무를 가지치기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 내 맘대로 전정하는 것은 어쩌면 기물파손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즉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내 맘대로 다룰 수 없는 것이 모두의 공유 시설인 공원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렇게 공적으로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내 집 앞 자연처럼 도시 공원에 내 뜻을 담아 즐기며, 친근하게 가꾸고 싶어한다. 공원을 정원으로 여긴다. 건강을 위해 소요하며 운동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이들과 자연을 체험하기도 하고 피크닉과 텃밭을 즐기기도 하는 개인정원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공원의 변신을 이끄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무섭게 보이는 자연이 아니라 친근한 일상으로서 도시적 삶의 확장이자 일부로 공원에 생활(문화)이 요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민참여는 대표적으로 기능 공원을 그것이 담긴 장소로 되살리는 실천 방식임도 알 수 있다. 자연물과 시민이 다시 만나는 새세기의 공원은 그러므로공공의 정원으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기능이 아니라 누구나 공유하며 함께 가꾸어야 할 도시의 허파이자 자연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시민들을 우리 도시의공원사’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살펴보면 근대 공원은 정원사의 일을 뺏어버렸고 그 자리에 조경가(Landscape Architect)를 불러왔다. 칼베르 보(Calvert Vaux)가 센트럴파크를 통해 ‘(건물) 건축(Building Architecture)’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조경(Landscape Architecture)’ 개념을 설정하면서 옴스테드와 불화를 겪었던 것은 유명하다. 옴스테드는 적어도 여섯 가지 측면을 고려한 용어를 써야한다며 답답해했지만 결국 보의 용어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로써 자연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다룰 줄 알았던 정원사의 역할은 근대 도시에서는 중요치 않게 된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시민들이 직접 다양한 방식으로 공원 내의 정원사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센트럴파크만 하더라도 공원과 관련된 다양한 거버넌스가 형성되었고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시민 주도로 일년 내내 가득하다. 서울숲도 그에 못지 않은 활발한 프로그램으로 유명하다. 공원이 이미 시민들의 손에서 가꾸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공원이 시설에서 문화의 장으로, 모두가 공유하는 도시 공간이자 공공재로 진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정원사가 되어 시민들이 공원으로 돌아온 것이다.

 

확장된 공원과 공원문화: 도시를 유기적 삶의 공유재로... 

시민들이 주도하는 공원문화는 이제 공원녹지를 오픈스페이스로 보는 기능적 관점과 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공원이 삶이나 문화가 아니라 물리적, 기능적 대상으로 제한되어 왔기 때문이다. 오픈스페이스라는 어휘에는 건축적 시각이 담겨 있고, 여기에는 보(Calvert Vaux)의 잘못 설정된 문제의식도 여전하다.

 

그러나 여전히 전문가들은 도시 기능(분석적 사고)을 먼저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으로 줄리아 처니악(Julia Czerniak)은 도시 쇠퇴를 개선할 수 있는 전략적 매개체로 공원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산업도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공원의 새로운 기능 요청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거기에는 문화를 배경으로 하며, 시민참여, 도시 재활용, 공원의 사회적 활용 등 세부 테마들이 가득하지만, 도시 재생에 유용하다는 기능성 또한 여전한 것이다. 현대 공원에는 이처럼 모더니즘의 까마귀가 아직 날고 있다.

 

모두가 소유하고 모두에게 적극적인 자연으로서 공원이 말 그대로 도시의 정원문화(통합적 공원)로 재생성 되도록 도시의 유기적 상황과 맞물리는데 정원도시는 중요한 힌트를 준다. 이것이 처음 질문에 대한 실마리로 타당한지는 찬찬히 생각해 보자.

연재필자 _ 안명준 조경비평가  ·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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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lusgan@gmail.com
사진 _ 박상백 기자  ·  환경과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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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a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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