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생산의 사회와 “환경” 스트레스 - 2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라펜트l안명준l기사입력2018-05-18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Part 2: 12 환경 Ⅱ



과생산의 사회와 “환경” 스트레스

 



_안명준 오피니언리더

조경시공연구소 느티 대표│조경비평가




환경Ⅱ:  과생산의 사회와 “환경” 스트레스...
회복탄력성(resilience)은 환경에 대한 인류의 새로운 강요로 읽힌다. 스스로의 반성이 한계에 달했음을 인정하는 자조적인 활로 찾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환경은 그런 식으로 재설정되어온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니 낯설게 볼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새로운 접근과 관점을 체득하고 있느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기존의 개념과 새로운 개념 사이에서 수많은 오해들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환경을 처음부터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환경을 재설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되돌아볼 기회를 가져보자는 것이다.


환경의 사용 방식과 환경 개념의 진화 
우리가 잊고 있지만 환경은 원래 “노동의 장”이었다. 환경은 인간이 자연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첫 번째 인식 전환의 대상이자 과정이기도 했다. 경관보다 앞선 환경 개념의 설정은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놓아둔 채, 환경만을 이용과 활용의 대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인간은 그렇게 지구자연에 적응할 수 있는 개념적 알리바이를 형성한 것이다. 그런 만큼 초기의 환경에는 어떤 가치가 먼저 투입될 수 없었고 환경으로 단순화 된 사고(이론)와 제작(실천)이 아무 가책 없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인디언 추장의 연설은 그런 인간의 자연에 대한 알리바이를 너무도 유연하게 경고한 것이며 환경보다 ‘먼저인 것’을 똑바로 볼 것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은 원래 자연과 분리된 것이 아니었으나 환경이 물리적 객체로 분화되면서 그 또한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특히 제작 기술의 발전은 노동을 자연으로부터 떼어놓기 시작하였고 환경과 노동은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환경을 생각하는 노동이란 불필요한 것이 된 것이다. 노동의 장이었던 환경은 더 이상 필요 없었고 환경으로 연계되던 자연 또한 그렇게 최소한의 연결마저 단절되게 되었다. 결과는 노동의 활개였다, 산물의 과잉이었다.

노동은 기술과 함께 급속도로 성장하는 인류사의 중요한 축이었다. 기술이 새로운 기술을 불러오면서 산업화가 전지구적 생산의 장을 마련하였고, 이후 다방면의 전문화는 새로운 노동과 생산물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환경은 함부로 다루어지게 되었고 기술이 낳은 새로운 기술은 결국 소비를 뛰어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때부터 근대화가 불러온 자본의 힘은은 환경을 아련한 노동의 장이 아니라 ‘생산의 재료, 생산의 자원, 폐기물의 고향’으로 확정짓게 된다. 개념이 바뀌면서 자연과 소통하며 삶과 노동의 장으로 설정되었던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환경은 자연의 일부이자 통로라서 자연을 대변하기 마련이고 오해의 산물, 과잉의 산물이 점차 지구자연의 인간에 대한 태도마저 바꾸어놓게 되는 시대에 접어들고야 말았다. 기후변화, 환경문제로 대표되는 현실 문제가 일상화 하는데 채 20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근현대의 노동은 저 혼자 바삐 움직이며 여기 저기 새로운 성장과 그 결과를 내놓기에 열심이다. 반성이 없지는 않았으나 관성을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이러한 근현대화의 과정에서 굴업도라는 섬에는 시대별로, 섬의 장소별로 독특한 인문경관을 형성하며 그 변화를 기록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개발 논리와 보존 논리가 부딪히면서 새로운 양상의 인문경관이 두드러진다. 곳곳에 기록된 태도의 변화는 환경 개념의 확장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독특한 천연자원으로 의미 있는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새롭게 부각되는 문화경관의 상황은 환경을 보는 우리시대의 입장이 어때야 하는지 가르침이 되어 준다. 

오늘날 환경은 그렇게 이용과 보존, 나아가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의 대상으로 인식되며 작든 크든 지구 곳곳 어디에서나 이슈로 부각되곤 한다. 그리고 환경의 개념은 자연의 알리바이로서가 아닌 새로운 역할을 요청받게 된다. 환경은 이제 자연의 알리바이가 아닌 자연의 대변인으로서 역할하기 때문이다. 그 본성을 쉽게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 자연의 특성에 우리는 환경을 매개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를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 어려운가? 간단히 말해 환경은 물리적 요소로 축소되어 활용되다가 이제는 그 본성인 자연을 지향하고 보여주는 매개체로서 보다 복합적인 도약된 개념으로 재설정되고 있는 것이다. 환경은 스스로 그러한 성질을 이제 스스로 보여주려고 한다. 환경은 “인간에 대한” 자연의 매체이자 자연의 얼굴이다. 


환경의 기질과 형질: 환경의 본성과 과생산의 덫
처음의 환경으로 다시 되돌아가 보자. 환경은 자연의 기질(matrix, temperament)과 형질(character)을 매개한다. 환경은 그것을 인간적 시각으로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다. 분해와 분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서 시작된다. 이를 토대로 인간은 사고의 확장을 이룰 수 있었고 기술 발전과 생산의 확장으로 더 나은 삶을 영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짧게 설명했지만 이를 부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환경은 결국 인간이 그 필요에 의해 설정한 추상적 개념으로 우리가 친환경, 친자연을 말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필요와 인간적 삶을 우선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간의 역사에서 자연이 해를 입으면 결국 그 결과가 인간에게도 미친다는 경험적 지식이 녹아 있다. 그것을 우리는 먼저 인정해야 한다. 환경을 먼저 고려한다는 입장은 다양한 동식물과 인류가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지속가능하게 이 지구를 영유해야 한다는 점이 아니라, 우선은 인간을 중심으로 자연을 기질과 특성으로 이해하고 거기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 말이다. 지나친 인간중심주의라고 할 만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환경은 결국 인간을 위해 설정된 개념(사고의 덩어리, concept)의 하나일 뿐이다. 


인간 중심 환경관의 함의(자료 : 안명준)

문제는 그러한 인간이 생산의 폭주 속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의 장이 아닌 생산의 자원이 되어버린 환경이 마주한 현실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일자리 문제로 대체된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은 결국 환경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 도입되면서 노동을 소외시킨 대가이다. 생산은 또 다른 생산을 위해 끊임없는 성장을 필요로 하게 되고 이것은 결국 쓸모 이상의 생산물과 부작용을 낳게 하였다. 소위 환경문제가 발생한 배경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생산의 덫”이 가져온 “환경에 대한 인간의 문제”이다. 정확하게 말해, 환경이 문제인 것도 자연이 문제인 것도 아닌 것이다. 쓸모의 세계에서 성장한 환경이 더 이상 그 쓰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것이 작금의 과생산 사회의 덫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환경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환경의 번아웃과 ‘회복탄력성’
요즈음 우리는 회복탄력성(resilience, to jump back)이라는 용어를 다방면에서 접하곤 한다. 특히 심리학, 정신의학, 교육학 등 문화사회적 개념으로 사용되던 것이 ‘복원력, 탄력성, 회복력, 저항성, 내구성 등’으로 인식되며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환경이 얼마나 인간적인 개념인지 이해할 수 있다. 공원의 회복탄력성을 논하는 것처럼 도시공간에 적용되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입장은 어쩌면 환경이, 특히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환경이 저 스스로의 내적 변화 가능성보다는 미리 설정된 의도나 의미에 맞추어 불의의 상황을 해쳐나가길 바라는 것으로 읽힌다. 어떤 면에서는 고립된 공간의 자립성이나 지속성을 해설하는데 사용되는 것으로도 읽힌다. 

앞서도 보았듯 환경은 자연과 인공을 매개한다. 환경은 자연의 일부이며 환경 그 자체는 자연의 드러난 모습이자 인간이 이해하는 양상일 뿐이다. 다시 말해 회복탄력적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회복탄력성 개념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는 따라서 여전한 인간중심주의를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생태학을 기반으로 탄생한 개념이지만 문화사회학적으로 널리 쓰이다가 자연재해가 많아지면서 불확실한 미래를 적절히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다시금 소환되어 널리 활용되는 개념인 것이다. 최근의 경향은 이 개념을 환경에 별도의 인격성(spontaneity)을 부여하여 환경을 자연화 하는 입장으로 읽힌다. 

여기서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 보면 회복탄력성 개념은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가해가 이루어질 것임을 전제하며 이를 얼마나 수용하여 방어하고 끊임없이 본래대로(systems to recover) 되돌아가게 할 것인가를 개념화 한다. 그것은 과생산의 관성을 그대로 품고 있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음을 사전에 인정하는 관점이고 보수적 입장이기도 하다. 결국 이는 환경의 번아웃을 염두에 둔 것이고 그것이 현실화할 것을 대비하자는 창의적인 접근이다. 

당연하게도 환경에는 뭔가 회복을 방해하는 문제 또는 한계가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역시 인간적인 시선에서 보자면 ‘번아웃증후군(burnout syndrome)’으로 대비해 볼 수 있다. 기후변화와 지자기 변화 같은 사항들은 환경 또는 일부 환경시스템이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의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며 어떤 면에서는 미리 대비하기 위한 선제적 아이디어를 요청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회복탄력성은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핵심은 이것이 문제의 근원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직 우리는 환경과 자연에 대해 알지 못하는 점이 많고, 기술 발전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환경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할 것이고, 자연은 멀찍이서 저만의 갈 길을 준비할 것이다. 역사가 깊은 언어와 어휘에는 그간의 경험과 생각이 충분히 녹아들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환경과 지금은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관련 개념들에 담긴 그것을 먼저 볼 줄 알아야 한다. 창의적 대응은 그러할 때 가능하다. 또한 자연은 환경과 달리 시간과 같이 존재한다. 환경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그 드러난 모습의 하나이다. 자연의 매체인 환경을 그 자체 인격적 대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저만의 시간을 달리는 자연을 더욱 멀어지게 할 뿐이다. 번아웃과 회복탄력성은 그러한 입장에서 다시 생각되어야 할 아직은 어색한 ‘오래된 개념’이다. 


놀이 가득한 환경을 위하여
습관적으로 우리는 환경에서 인간을 제외하곤 한다. 대립적으로 보기도 한다. 변증법의 정반합이 무엇을 반(反)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그 결과와 방향이 달라지는 것처럼 환경/자연과 인간은 대립의 관계로 볼 필요가 없다. 특히 인간을 자연의 우세 생명인양 으스대며(swagger) 특별히 대할 이유도 없다. 인간이 스스로 놓은 덫을 생각하며 책임을 통감하는 반성적 존재라는 점에서는 특별하지만 근시적인 이해와 자꾸 새로워지는 ‘환경’은 경계해야 한다. 

놀이가 죽기 살기의 싸움이 되어버린 시대이지만, 인간은 이미 이를 돌아보며 환경과 삶터의 본 의미를 되찾아가고 있기도 하다. 해법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미 변증법을 벗어나 있다. 다만 본능에 남아 있는 놀이욕구는 스스로 그러한 환경을 대하는 자세를 그렇게 불러들이는 중이다.

조르쥬 바타이유는 말한다. “지구상 생명들은 태양의 사치이자 낭비의 산물”이라고. 그러나 그는 모른다, 아니 이해하지 못한다. 합리적이지 못한 모든 지구상의 생명들은 놀기 위해 살아간다는 점을. 그건 태양이 준 선물이 아니라 자연과 환경이 주인공으로 이름 불러 세우고 그 안에서 놀게 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이다. 
_ 안명준  ·  조경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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