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space-time)의 ‘자연’과 시존재(time-being)의 ″자연″ -2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라펜트l안명준l기사입력2017-06-30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Part 2: 07 자연(Nature) Ⅱ



시공간(space-time)의 ‘자연’과 시존재(time-being)의 “자연”...

 



_안명준 오피니언리더

조경시공연구소 느티 대표│조경비평가




자연Ⅱ:  시공간(space-time)의 ‘자연’과 시존재(time-being)의 “자연

분석적 시각이 팽배했던 시절에 인간의 노력은 결국 자연의 소스코드(source cord)를 찾는 것과 같았다. 환원주의, 객관주의로 이해돼온 그것은 결국 자연이 말하게 하기 위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자연(지구) 이해의 단면은 풍부해졌지만 단면들이 이루는(함의하는) 입체(또는 시스템) 이해는 여전히 빈약하다. 그래도 우리는 빈약한 대로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즐길 정도는 되었다. 작은 정원(지구)에서 이런 태도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을 시존재로 대하는 문화까지도 가지게 되었다.


거시적 자연, 수줍음의 틈(Fissure de timidité)
코지원을 통해 보는 제주의 자연은 일종의 묘사 행위의 단면일 뿐이다. 이것은 그대로 자연을 전달해주지 못한다. 글자를 통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미지를 통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묘사나 설명으로 전하는 자연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대신 우리는 적극적인 시점(관점)을 하나 예시로서 가질 수는 있다. 충분한 설명은 아닐지라도 이는 소통하고 나누는 기본적인 방법이 된다.

시점을 가진다는 것은 ‘미적 관조’를 가능하게 한다. 500여 년 전 자연을 관조하면서 경관(Landscape)이 소통의 매체이자 수단으로 재설정 되었던 것(서양사의 경우)도 이 때문이다. 이후 이것은 그림에 담겼다가, 정원에 담겼다가, 도시에 담기기까지 하면서 문화의 하나로 정착하며 태도(미적 취향, taste)로 고착되게 된다. 당연히 이때의 문화는 자연적이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이다. 인위적 분리는 생각의 산물이며 이것이 이론이 되어 다시 분리(분석)를 고착화시킨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관조(태도)는 거짓이다. 우리는 아무리 떨어져 자연을 보려 해도 그럴 수 없다. 그것은 묘사나 설명을 통해 인류가 얻은 가상의 시점일 뿐이다. 아름답게 보이는 자연의 모습들은 사실 관조가 가져다준 낭만적 사고이자 감상일 뿐이다. 수줍음의 틈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녹색의 자연을 아름답게 바라보며 즐기는 우리시대 인간에게 자연은 그저 덤덤히 악할 뿐이다. 그러므로 매체(묘사와 설명으로 점철된)로 전해지는 자연을 경계해야 우리는 잊어버린 본질(nature)에 다가갈 수 있다.


수줍음의 틈 ⓒ안명준

결과적으로 우리가 지금 이해하는 자연(nature)은 “영적·인격적·정서적 속성”(황기원, 2011)을 빼앗긴 채 물리적 시공간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생각 영역의 확장이 가져다준 거시적 시점이 인간 스스로를 낯설게 한 결과이다. 낮게 보고 가까이 보더라도 이제 우리는 총체적 시각으로 자연을 대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것은 직접 체험하고 느낄 수 있어야 풍요로운 자연과 만날 수 있음을 말한다. 마치 기술이 발달하며 등장한 CD가 LP의 아날로그 감성을 흉내 낼 수 없듯이 말이다.

큰 눈으로 바라본 자연은 현실감, 현장감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거리를 두고 즐기는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주곤 한다. “사람은 이런 웅장한 광경을 마주하면 자기에 대한 인식과 남을 대하는 태도, 나아가 시간의 경과에 대한 지각에 엄청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대신 자연의 그 수줍은 틈이 내포하는 힌트에는 멀어지게 된다. 자연은 더 이상 객관적 사물이 아니다. 인류와 동시에 실존하는 현존재이자 만현상의 근원이다. 


미시적 자연, 알 수 없는 소스코드
인류에게 이해(학문, 앎)의 범위는 넓지 않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어떠한 범위에서라도 이해의 정도는 여전히 충분치 않다. 낮고 작고 조밀하게 들여다볼수록 필요한 이해의 폭과 깊이는 더 커진다. 자연은 점점 더 그래왔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자연이 스스로 작동한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을 부르는 설계의 내용, 즉 소스코드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먼저 물어야 한다. 그러할 때 소위 ‘생태주의’로 점철된 새로운 이해의 방식(시점, 실천)을 진단해볼 수 있을 것이다. 

크게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와 치밀하게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는 근대 이후 우리가 가지게 된 자연에 대한 새로운 태도이다. 물리학에서처럼 이론을 먼저 실체에 앞서 예상하거나 이해하려는 태도까지 가지게 되었다. 성과가 없지는 않아서 자연이 내포한 어떠한 원리(일종의 법칙)를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퍼즐처럼 가지게도 되었다. 인간은 흉내내기(mimesis)의 대가라 때로는 그것을 응용하여 비슷한 자연(Pseudo-Nature)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편리의 시선으로 보고 있으며, 그 주인공을 떼어낸 채 객관이라 믿는 시점에 기대어 이해를 넓히고 있다 믿는다. 그럴 때마다 자연은 오히려 점점 더 인간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코지원 세부 모습 ⓒ안명준

착각도 자유라, 많은 학문이 군림하듯 자연을 이해의 영역에서 다루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접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시각이라도 그것은 오해이자 착각이다. 우리는 자연의 소스코드를 알 수 없는 자연 속의 존재일 뿐이다.


인간적 자연, 거세된 시간
생각이 많아지면서 인간은 자연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수명을 연장하고 생활을 편리하게 하였다. 수많은 학문이 저마다의 시점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도 결국은 자연이다. 인류는 그렇게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된 것을 교과서에 담아 공유한다. 여럿이 함께 다방면으로 검토를 거쳐서 더 이상의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에는 원리, 원칙, 법칙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한다.

그런 사고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시간을 고정한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시간을 고정해두고 대상을 관찰하거나 시험하는 것이다. 차원(시점)을 넘나드는 시간을 고정함으로써 시야가 분명해지는 것은 모든 학문의 기본 속성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자연은 그 본성 중 하나가 시간에 있다. 

다시 말해 그간 우리는 자연을 시간을 고정한 채로 먼저 이해하려 한 것이다. 최근에서야 시간적, 단계적 고려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전략으로 등장한다지만 여전히 우리는 자연을 그 자체의 시간성에서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그렇더라도 시계의 초침처럼 순간으로 나누어서 먼저 생각한다. 자연은 그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인간은 공간은 점령할 수 있으나 시간은 어쩌지 못한다. 시간은 여전히 정의되지 않는다. 시계는 시간이 아니다. 시계침의 움직임 같은 모든 것들의 변화는 시간의 얼굴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자연도 시간의 얼굴인지 모른다. 

따라서 자연을 일종의 소산으로 보았던 서구 과학적 시각을 정좌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해 자연의 능동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왔고 거기에 기반을 둔 도시 만들기 사고도 이미 충분하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러한 시점은 자연을 물체로 보는 눈이 우선한다. 자연을 시공간의 어떤 현상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편리함이야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편리함 뒤에 놓인 오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반성적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물체가 아닌 상태로서의 자연으로 다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연과 정원은 그것을 실천하는 중요한 힌트가 된다.

그러한 힌트는 인류에게 자연을 시존재(time-being, time-existence)로 보아야 할 필요와 당위가 된다. 나아가 사고방식으로서가 아니라 경험에서 먼저 필요해 졌다. 시존재 관념은 자연이 가진 본래적 속성에 좀 더 다가가려는 인류애적 노력이 된다. 자연에서 거세된 영적, 인격적, 정서적 측면을 공간(물리적 측면)이 아니라 존재성(being, 총체적 측면)에 기대어 다가가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자연은 충분히 그렇게 대접받을 만하다.


숨겨진 코지원 건물 주변부 경치 ⓒ안명준


시존재로서의 자연과 실천 방향
자연조차 시간은 어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자연의 소스코드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자연이 그 자체로 시간과 같음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코지원은 만들어가는 과정 전체가 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이정표와 같은 단계(phase)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장소가 가지는 시간적 변화(흐름)를 뼈대로 한 것이다. 3월부터 꽃이 피고, 연못의 토대가 다져지며, 잎이 돋고 교목이 자리를 잡으며, 새 돌이 자리 잡고 데크가 보완되는 등의 변화가 코지원의 장소적, 시간적 속성의 토대에서 계단처럼 이루어졌고 지금도 그러하다. 

코지원의 자연은 시공간에 그 방점(특징)이 있지 않다. 우리가 잊어버린 시존재로서의 자연에 집중하는 것은 시점을 거시적인지 미시적인지 분석적으로 나누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이것 또한 하나의 시점임에는 분명하지만, 자연의 속성과 흐름, 어렴풋이 알게 되는 그 장소만의 소스코드를 보완하는 방식으로서 접근하고 충분히 교감하며 시간과 인내를 들였다는 점부터 기존 방식과 다소 차별화 되지만 무엇보다 자연을 시공간이 아니라 시존재로 이해하고 실천한 점은 강조할 만하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는 자연에서 어떤 기운을(“영적·인격적·정서적 속성”) 회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장소성 회복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 출발은 자연을 물리적 분석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하나의 존재로, 시존재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와 관점에 있다. 그러한 실천은 굳이 현대 과학에 기대지 않더라도 장소를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이론에 기대고 권위에 기대고, 나아가 소문과 평판에 기대던 스스로를 성찰하며 “그대 스스로 그 차이를 보라”(법정, 『무소유』)던 선사의 말씀으로 새겨둘 만하다.


성장하는 시존재, 지금여기의 인간자연 ⓒ안명준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 자연은 꾸준히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 자연은 선하지 않다. 선하지 않은 존재이다, 시련을 주는 존재이다. 시존재로 보는 자연은 인간에게 어떤 성찰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즉 시존재는 그러하다. 그런 면에서 이 지구에 ‘코지(작은 곶)’ 하나 잡아두고 노 저으며 놀다 가는 것(遊景, 庭園)이 인간이다.

글·사진 _ 안명준  ·  조경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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