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지적 지향성의 ‘예술’과 먼저 가 있는 ″예술″ - 2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라펜트l안명준l기사입력2017-08-04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Part 2: 08 예술(Art) Ⅱ



담지적 지향성의 ‘예술’과 먼저 가 있는 “예술”...

 



_안명준 오피니언리더

조경시공연구소 느티 대표│조경비평가




예술Ⅱ:  담지적 지향성의 ‘예술’과 먼저 가 있는 “예술”...

 

슈즈트리를 통해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 작품 설치의 직접적 배경은 무엇일까? 혹 개장되는 큰 작품 뒤로 펼쳐지는 더 보기 싫고 흉물스러운 자본의 경관들을 잠시나마 가려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저 너머 “이글거리는 욕망”의 땅을 그렇게 반어적으로 이슈화한 것 아니었을까? 그리고 과연 이것은 어떻게 판단해볼 수 있을까? 특히 예술로서의 “슈즈트리”를 통해서라면? 디자이너의 말대로 “형태는 감정을 따르는” 것일까?


문화와 예술(미술) 사이의 우리
방문해 체험해 본 작품에서는 비가 지난 후였음에도 냄새가 나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신발 가게에서 맡을 수 있는 진한 화학물 냄새는 물론이고 고인 물이 썩으며 나는 냄새, 오래된 신발에서 나는 찌든 발냄새 등도 문제될 만큼 느끼지 못했다. 기사에서처럼 냄새와 벌레가 심할 것이라는 ‘느낌적인 느낌’은 적어도 내게는 없었다. 카더라식, 어찌어찌할 것 같은 등의 수식으로 전달되는 작품에 대한 선입견 또는 팩트 아닌 첫인상은 작품 앞에서 기우일 뿐이었다. 현장이 주는 감각, 작품이 주는 감성은 그런 면에서 미디어를 통한 관점의 전달만으로는 절대 실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뭔가 다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을 것 같은 정말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느낌적인 느낌’이 기술복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원본 작품만의 아우라와 겹쳐지며 왜 아무도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하였다. 그런 생각 중 시민들의 모습은 대체로 작품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슈즈트리를 즐기는 시민들

자 이제 작품과 매체 사이의 본질을 빗겨간 그간의 논란을 벗어나자. 작품은 철거되었으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작품과 매체로 치환된 줄다리기가 아니라 작품이 우리에게 던진 무거운 질문일 것이다. 바른 질문을 찾는 것은 바른 답안과 진화의 힌트를 찾는 중요한 시작이 된다. 그런 점에서 슈즈트리에 던져진 그간의 물음은 “다시 물어져야” 하고 슈즈트리가 던진 새로운 물음은 다시 살펴야 한다. 

그러기에 앞서 우리는 논란과 관련된 저간의 배경에서 하나의 관점을 먼저 가져올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공공의, 모두의 삶터에서 생활환경과 생활경관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보아야 하고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 하는 일일 것이다. 모두의 삶터는 그야말로 모두가 공유하는 것으로 막강한 점유도 느슨한 방치도 모두 문제가 되는 극단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 사이 어디쯤에서 모두가 만족하는 지점을 찾으면 좋겠으나 현대처럼 다원화된 삶터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므로 적절한 합의와 공유가 절실해진다. 

이때 적절한 합의와 공유는 ‘소통’이라는 수단이 먼저 고려되곤 하는데 실은 그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공유하는 삶터에 접근하는 개별 시각의 위상을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소통은 그야말로 실행을 위한 방법이자 채널일 뿐임을 우리는 흔히 잊곤 한다. 슈즈트리와 같은 공공미술을 예로 살펴본다면 본질적인 부분은 문화와 예술 사이의 그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교양이라고 할 수 있다. 압축하듯 언급하였지만 공유하는 삶터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문화와 예술이 두 축이며 그 사이를 관통하는 교양을 읽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공의 작품(삶터)을 살필 때 작품과 관계되는 교양의 양상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면 그 작품의 위상이나 평판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 교양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펴야 할 것인가? 요즈음 유행하는 전화설문을 통하면 알 수 있을까? 아니면 몇몇을 만나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면 알 수 있을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평소에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공공미술의 성패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위치, 그 시점은 개별 작가가 찾아야 할 우리사회 밝은 눈의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강조하는 ‘소통(심의, 회의, 홍보 등)’은 그저 보완책일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화와 예술을 슈즈트리는 복잡하지만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현대미술이 가진 특별한 수법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은 보기 싫게 느껴질 것 같고 냄새날 것 같은 버려진 쓰레기로서가 아니라, 또 그것은 지나친 소비와 낭비의 자본 폐해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그곳의 역사와 주변의 관계에서 작가의 눈으로 찾아진 우리시대 교양의 단면일 뿐이다.

논란을 보면서 우리가 이처럼 누추하다는 점에 안타까웠고 우리가 이처럼 시끄럽지만 침묵한다는 점이 안타까웠고 우리가 이처럼 이럴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그런 점에서 슈즈트리는 우리시대 공공미술의 이정표라 할 만 한 것이다. 


기술융합시대의 예술, “뿌리 없는 융합”의 착시
생각해보면 첨단의 예술과 기술은 보편화, 대중화 하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자연이 경관이 되고 경관이 다시 풍경으로 거듭나 녹색의 경관을 모두가 아름답게 즐길 수 있는 시각을 가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50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식이 한정되었던 시대에는 수천 년이 걸리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예술의 문화화는 언제나 얼마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렇지만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그 시간이 매우 달라졌다. 음악의 경우 10년 전과 지금의 대중화 속도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동시 발매가 이루어지는 음악뿐이겠는가, 예술의 많은 장르가 기술을 매개로 하여 손쉽게 첨단에서 단말로 연결되곤 한다. 그래도 여전히 예술과 예술가는 첨단과 경계를 걷는다. 그 점을 우리는 잘 살펴야 한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손에 잡히는 그것이 실제 작품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 착각하기 쉽다. 장르에 따라서는 단말로는 경험할 수 없는 실물이 가지는 현장성 또는 아우라를 우리는 느낌적인 느낌으로 모두 체험했다 착각하곤 하는 것이다. 이후 우리는 버지니아 포스트렐(Virginia Postrel)이 강조하듯 “새로운 시대는 좋든 싫든 미학적 선택을 해야만 하며, 따라서 개인의 생활이든 기업의 제품이든 간에 ‘스타일’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즉 전자기기, 이동통신 등 작품을 즐길 수 있는 손쉬운 매개체가 보편화 하면서 우리는 화면이나 텍스트로 전달되는 실물이미지를 직접 체험한 듯 착각하곤 한다. 기술복제시대의 문제는 작품의 원본성에 있지 않고 이처럼 먼저 가 있는 관람자들의 선입견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특히 공동체 문화가 살아 있는 우리의 경우 이러한 현상은 부차적 작용으로 확대되어 쉽게 나타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수단들은 직접민주주의를 논하게 할 만큼 긍정적인 논의로 확대되기도 하지만 슈즈트리처럼 느낌적인 느낌으로 고착하기도 한다. 우리시대 작품과 작가가 마주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작품이 보여주려는 바는 뒷전이고 그것이 확산되며 형성된 매체적 착시가 먼저인 것이다. 

기술은 이처럼 작품의 아우라를 무시하는 상황이 아니라 작품을 모두 체험했다는 착각, 착시의 느낌적인 느낌을 대중화했다. 그리고 이것의 또 다른 문제는 원본이 가진 스케일감(실제 크기, 장소적 특성)을 잃어버리게 한다. 즉 기술융합시대의 작품은 먼저 가 있는 착시들에 직면하는 것이다. 매체를 통한 작품은 크게도 작게도 너무 손쉽게 볼 수 있게 하며 작품 자체는 물론이고 작품 주변은 실제적으로 느끼게 하지 못한다. 


삶터가 갤러리여야 하는가? 
작품보다 먼저 가 있는 이러한 착시는 작품에 대한 몰입된 감상을 방해할 수밖에 없다. 직면한 작품은 실제 “심오하지만 오류일 수도 있고, 삶에 진실하지만 흔해 빠진 것일 수도 있으며, 통찰을 주지만 편파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작품과 직면한다는 것은, “예술적 감상에 참여하는 것은”, “상상력을 이용해 다양한 가치의 근원들을 탐색하는 대화에 참여하는 것”(Matthew Kieran, 2010)이기도 하다. 관람자를 주인공화 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흔히 우리가 무관심적 관조를 떠올리며 작품을 대할 때나 가능한 것으로, 쉽게 말해 외부로부터 한정된 갤러리에서나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문제는 작품이 생활공간에 놓이게 되면서 발생한다. 작품이 일상의 공공공간을 점유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장소의 모습과 새로운 작품과의 직면이 새로운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아름다운 도시, 아름다운 삶을 위해 우리는 삶터를 갤러리화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유럽의 고풍스러운 역사도시들이 가진 도시경관을 떠올린다면 삶터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자 생활공간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잘 알 것이다. 생각은 우리 도시의 경관은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지 못하였을까로 이어진다.


담지적 경관과 도시적 소통의 매체

도시와 경관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삶터의 갤러리화로 돌아오면, 갤러리는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지만 최근에는 전시장이라는 측면보다는 작품을 작품이게 한다는 측면에서 다양한 외양을 가지고 만들어진다. 갤러리가 작품과 작가를 모으기도 하지만 작품과 작가가 갤러리를 형성하기도 하는 것이다. 미적 감흥이 오고가는 곳이 갤러리라고 좀 더 느슨한 정의를 가진다면 우리 도시는 서구의 도시들과는 다르게 갤러리답지 못하다고 할 만하다. 이것은 아직 우리가 삶터를 갤러리로 볼 여유가 없음을 말해준다.

이런 환경에서 작품이 거리로 먼저 나가는 것은 그야말로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이 슈즈트리에서 발생한 셈이다. 공공디자인이라고 다를까, 서울로7017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는 논의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을 수는 없다. 최소한 작품을 구식 갤러리로 몰아넣는 야만은 벗어나지 않았는가. 

삶터가 갤러리로 여겨지지 않는 문화라면 우리는 아직 공공미술에서 할 일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가 흔히 잊고 살지만 우리시대에는 무엇이든 경관에서 만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를 지원할 정책적 방안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문화와 예술 사이의 핵심 교점인 교양의 측면에서 무언가 해야 할 사항들을 먼저 찾아야 한다는 점이고 어렵지 않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의 공유도시를 위하여
언제나 작품은 관람자에게 향한다. 그에게 해석되고 감흥 되길 기다린다. 우리 도시의 공공공간들이 이처럼 담지적 작품들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또 다른 폭거가 될 수 있다. 많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니까. 그런 면에서 삶터의 모두를 갤러리로 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생활과 작품 사이의 간극이 그 정도인 것이다. 그 접점을 찾는 일이 쉽지는 않겠으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삶터라면 그 각자만의 접점을 가지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21세기를 지나며 우리 도시는 그런 삶터로 진화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싶다.

생각을 좀 더 멀리 보내본다면, 여기에 정원의 새로운 가능성이 드러난다. 생활과 작품의 간극을 메워줄 도시의 적정한 아이템은 정원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의 정원은 떼어놓고 감상하는 그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고 가꾸고 즐기는 그것이어야 한다. 행동보다는 태도에 방점을 두는 가드닝이라면 충분히 속도를 높여줄 수도 있다. 그러할 때 문화와 예술 사이의 그것은 더욱 폭넓은 가능성을 가지고 쉽게 우리 삶터에 안착하게 될 것이다. 

취향(taste)이 되지 못한 교양은 누추하지 않은가? 키치(kitsch)와 캠프(camp)가 혼성인 시대에 우리 삶터에는 그 배경으로 수 천 년 역사 유물들을 도시에 가지고 있음을 상기하며 아름다운 삶터로 이제부터라도 거듭나도록 실천을 고민해야 한다. 먼저 가 있는 또 다른 그것에 기대하며.
_ 안명준  ·  조경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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