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조경_ 옴스테드와 보의 사잇생각: 테크네 ‘조경’(上)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_3회
라펜트l안명준 조경비평가l기사입력2013-02-08

경공환장(景空環場):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03조경_ 옴스테드와 보의 사잇생각: 테크네 ‘조경’(上)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현대 사회는 생산 시스템의 다변화로 다양한 잉여 가치가 쏟아지고 있어 직업조차도 귀천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은 직업에도 가치와 윤리가 필요함을 역설해주는데, 혼합이 요구되는 사회적 변화와 진입장벽 속에서 우리시대 조경()은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해보게 한다.

 

조경(landscape architecture)보다 먼저였던 조경가(landscape architect)

이론이 먼저 있고 그것을 실천하는 직업이 생기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근대적 의미의 조경도 조경학(학문, 이론)보다는 조경가의 탄생이 먼저였다. 그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화장품이 화장이라는 개념을 형성하고 그 개념이 다시 화장품을 발전시키며 순환해온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근대 조경의 태동지였던 미국의 경우도 조경가를 대표하는 단체(미국조경가협회(ASLA))가 먼저였던 점만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근대 조경의 태동기를 살펴보면서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되돌아보고자 한다. 여기서부터 직업으로서의 조경이 태동하던 시기의 상황과 조경으로 설정된 역할(기능)을 되새기고 우리시대 조경의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조경 탄생의 즈음에는 영국 풍경식 정원의 영향과 도시 시설로서 자리 잡기 시작한 공원이 미국을 중심으로 문화의 일면으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 앤드류 잭슨 다우닝은 센트럴파크의 정책적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지원하였는데, 이 때문에 근대 조경의 시작을 옴스테드보다 앞선 그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들의 신념과 노력은 공원의 등장 및 성장 과정과 함께 조경을 사회적 직능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게 했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1800년대 중반의 근대 공원을 통해 정원사(gardener)가 아니라 조경가(landscape architect)를 탄생시켰다. 18세기를 지나며정원을 풍경화처럼 꾸미는 기술로서 랜드스케이프 가드닝(landscape gardening)이 등장하여 발전하고 있었는데, 이것에서 차별화된 도시적 필요와 시민의 요청(social needs)이 이전과는 다른 직능(조경가)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디자인 트렌드가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데, 경관 또한 디자인과 시공(architecture)의 대상으로 부각되면서 점차 가드닝과는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여기에 이후 모더니즘으로 불리게 될 여러 상황들이 태동하면서 풍경식 정원의 전통은 기세를 잃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경의 선구자들이 이때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다우닝과 옴스테드, 보는 잘 알려져 있는 인물들이다. 이 당시의 조경 분야로 시선을 옮겨보면 재미있는 상황을 보게 되는데, 센트럴파크를 담당한 옴스테드와 보가 처음에는 그다지 마음이 잘 맞는 콤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옴스테드(Olmsted)와 보(Vaux)_ 출처(www.prospectpark.org)

 

처음 두 사람은 센트럴파크를 추진하면서 직책에 대해 아키텍트나 컨설팅 아키텍트, 감독 정도로 표기한다. 그러나 1863년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조경가(landscape architect)라는 말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시기에 둘 사이에서 새로운 작업에 대한 관점과 입장의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이때 조경가라는 말을 쓴 것은 옴스테드와 상의 없이 보가 단독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옴스테드는 말한다. “나는 ‘Landscape Architecture’라는 비극적 용어 때문에 줄곧 괴로워했다. Landscape라는 말은 좋은 단어가 아니고, Architecture도 그러하며, 두 단어를 합한 것도 그러하다. Gardening은 이보다 더 못하다. 나는 ferme village ornée를 번역한 용어 street ornée 같은 말을 찾고 있는데, ornée(장식)가 그 뜻은 아니다. 그 예술은 가드닝도 아니고 건축도 아니다.” 나중에는 옴스테드도 조경가라는 명칭을 받아들이고 사용하게 되면서 둘의 사잇생각 속에서 근대 조경이 점차 윤곽을 그려나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의견은 다소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새로운 직능(이름)을 설정할 필요를 공감했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의 발단은 두 사람의 배경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칼베르 보는 설계에 있어서 보자르식 정통 교육과 훈련을 거친 영국식 실무 전문가였고, 센트럴파크를 통해 전문가로서 ‘building architect’에 대응하는 용어로 ‘landscape architect’를 설정하였던 것이다. 뉴튼(Norman T. Newton, 조경사가)은 이에 대해 건축가가 디자인에 중점을 두고 빌딩을 책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경관을 책임지겠다는 의미였다고 지적한다.

 

반면에 옴스테드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언론인, 위생국 서기관 등을 거치면서 사회에 대한 관심과 역할이 보와는 다른 위치에 있었다. 그는 줄곧 공공예술의 관점에서 자신의 활동이 설정되고 이해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보가 설정한 직책명으로서의 용어가 맘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옴스테드는 보에게 꼭 그래야 한다면뜻이 분명하고 쓰기에 편리하며 다른 것과 구별되는것이어야 한다는 어려운 주문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조경가라는 말이 점차 쓰이게 되면서 그가 보보다 먼저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이라는 분야명을 언급하게 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조경은 이처럼 비교적 그 직능 탄생이 명확한 분야이다. 도시공원이라는 사회 개혁과 민주주의 성공의 매개체로 시작되었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옴스테드와 보가 서로 충돌하고 수렴하면서 ‘be-er’이자 ‘do-er’로서 역할하며 전문분야로서의 사회적 입지를 분명히 하였다는 점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 사이에서 조경()이 사회적 서비스의 한 형태로서 시작되었다는 점과 경관(풍경)과 자연물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예술의 범위에서 설정되었다는 점이다.(계속)

연재필자 _ 안명준 조경비평가  ·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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