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풍경_ ‘전체에 대한 통찰’: 당신과 나만을 위한 “풍경”(上)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_4회
라펜트l안명준 조경비평가, 이형주 기자l기사입력2013-02-27

경공환장(景空環場):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04풍경_ '전체에 대한 통찰' : 당신과 나만을 위한 "풍경"(上)

 

오규원의 시구로부터 시작해 보자.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와르르 태어나

잠시 서로 어리둥절해하네

4월 하고도 맑은 햇빛 쏟아지는 아침

- '4月과 아침'

 

마음속에 신록이 움튼 살랑이는 4월 봄 햇살의 풍경이 그려지지 않는가? 시가 그림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전에, 다가오는 새봄을 떠올리며 풍경(개념)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보자.

 

풍경은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풍경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잘 알려진 폴 세잔에 관한 것이다. 남부 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의 생 빅투와르 산(Mont Sainte-Victoire)에 깊은 감명을 받아 많은 수의 그림으로 이 산을 담아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말년에 자신의 아뜰리에로부터 30분 정도까지 벗어나 이 산을 감상하며 산(자연)이 주는 감흥을 화폭으로 번안했던 것이다. 자연의 근본 형상을 찾고자 노력했던 초기의 세잔에서 벗어나 새로운 화풍을 완성한 시점이었고, 형태가 숨기고 있는 내면으로 눈을 돌리고 있던 때였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그가 이 지역 농부들보고 생 빅투와르 산을보지 못한다고 지적했다는 점이다. 산이 눈앞에 있는데 산을 보지 못한다니 언뜻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는 이 산이 주는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자신은 산이 보여주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는데, 정작 여기에 사는 이들은 그 감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는데, 배경으로 놓인 산(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단 이 지역 농부들의 입장에서 보면 삶터 부근에 놓인 산은 당장의 쓸모이자 위협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들에게 자연은 시련을 주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면서 땔감과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적응의 대상인 것이다.

 

반면에 화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산은 다른 자연과는 다른 독특한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먼저 보여지는 것이다. 즉 화가에게는 쓸모와 위험을 벗어난 미적 대상으로서 그 자연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산(자연)을 풍경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경치(아름다움)를 즐기는 사람이자 경치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고, 풍경이란 이때 생겨나는 것임을 알려주는 일화이다.

 

비슷한 일화로 터너와 함께 영국의 대표적인 풍경화가로 유명한 컨스터블(John Constable)도 세잔보다 앞서 자기 고향의 자연에 대해이곳은 화가에게는 아주 많은 기쁨을 주는 풍경이며, 나는 그 산울타리 그리고 속이 빈 나무들마다에서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8세기 영국의 풍경화가)를 보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며 풍경으로 달리 보이는 자연을 말하기도 했다.

 

이 일화는 자연이 그대로 풍경과 같지 않다는 점을 강조해준다. 또한 자연 속에 물건(물체)처럼 풍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도 강조해준다. 나아가 풍경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 자연을 보는 나의 태도와 연관된다는 점도 보여준다.

 

이것에 대해서는 일찌기 4세기경 사령운(謝靈運, 중국의 자연시인)듣기 위해서는 들어야 한다.”며 대상에 개입하는 태도(관점)를 강조하며 중요하게 지적하기도 하였다. 즉 자연을 감상의 대상이자 풍경으로 바꾸어 보기 위해서는 자연(대상)과 나(관찰자) 사이의 설정된 태도가 중요하며 이러할 때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풍경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것이다.

 

이때 본다는 것은과학적 관찰(scientific observation)’이 아니라감성적(미적) 간파(aesthetic prehension)’를 말한다. 그래서 풍경은 보고자하는 틀(프레임)과 함께다. 풍경은 물리적 실체와는 거리가 있는 감성과 의지의 범주에서 먼저 출발한다.

 


풍경은무엇에, 어디에에 있는 것이 아니라어떻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를 보는 입장에서 시작한다. 결국 그것은전체에 대한 통찰에 다름 아닌 것이다.(한라산과 제주의 오름_사진 이형주)

 

봐야만 보이는 풍경; ‘전체에 대한 통찰

 

풍경이란 이처럼보기 위해서는 보아야 한다.’는 조건이 갖추어질 때 가능한 것이다. 또한 외부 자연을 풍경으로 보는 시각에는 그 보는 주인공으로부터 시작하여 보는 것(대상)과 함께 이루는 심미적 상황이 기본을 이룬다. 그래서 오귀스탱 베크(Augustin Berque)는 풍경을보려고 할 때에만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풍경은 어떻게 보는 것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마티스의 일화가 도움이 된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그의 화실에 한 부인이 찾았을 때였다. 그 부인이 그림 하나를 보고 그림 속 여자의 팔이 너무 길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자 마티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부인, 부인께선 잘못 아셨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아니라 그림입니다.” 과학의 시선으로 보았던 부인과 풍경(예술)의 시선으로 보았던 마티스의 관점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일화이다. 그 차이는 과학이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분석과 객관화의 태도라면 풍경은 예술을 추구하는 이야기(감성적인 것) 탐구의 태도라는 데 있다.

 

분석적 시각으로 보는 태도는 그러므로 풍경에 다가가기 어렵다. 사실과 객관이 우선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합적 시각, 전체를 보려는 태도는 풍경에 한층 가깝게 이끈다. 전체를 대하며 나의 위치를 찾고 그렇게 찾은 나로부터 전체와 나의 관계를 파악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바사리의 경험이 잘 설명해 준다. “경험으로 볼 때 회화건 조각이건 그 무엇이건 간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은 그것이 완성된 작품일 때보다는아름다운 스케치(una bella bozza)’일 때 더욱더 아름답고 힘차게 보인다.” 흐리고 분명하지 않지만 한 번에 전체를 먼저 보게(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야 말로 먼저 통해 있는 미적 태도를 자극(간파)하는 것이다.

 

풍경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는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다루는 풍경은 내면의 보고자하는 틀에서 시작하여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외부에 투사된 미적 감흥의 전체라고 말이다. 풍경은 본래부터 부분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다루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자연을 대할 때 파노라믹 경관에 먼저인 것도 이와 관련된다.

 

그러므로 풍경은무엇에, 어디에에 있는 것이 아니라어떻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를 보는 입장에서 시작한다. 결국 그것은전체에 대한 통찰에 다름 아닌 것이다. (계속)

연재필자 _ 안명준 조경비평가  ·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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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_ 이형주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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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f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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