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자연_아비투스 지구 ‘자연’: 이야기 정원의 숭고미(下)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_7회
라펜트l안명준 조경비평가, 나창호 기자l기사입력2013-05-31

‘곳과 곧의 자연; 이야기 정원에 담긴 우리

 

분명히 ‘(있는 그대로의) 자연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자연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삶이 유한한 인간에게 자연은 습관적으로 이해되며 특별한 태도와 취향을 알게 모르게 만들게 했다. 자연을1의 자연, 2의 자연, 나아가 제5의 자연까지 구별하는 것은 대표적인 자연의 대상화와 습관적 인식 사례이다.

 

봉사하지 않는 자연은 여전히 인류를 위협하며, 이제까지와는 다른 차원으로 가히 가이아 지구가 인류의 능력을 초월한 거대한 힘으로자연의 자연성을 재편하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게 하고 있다. 기후 변화와 자연 재해는 대표적인 모습이며, 그 위협은 지역에 따라서는 삶터의 멸종마저 고민하게 하는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연에 대해 이제 굳어진 태도와 취향에서 벗어나 훨씬 오래된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할 때이다.

 

겸손의 시작은 앞서 이야기했듯 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우선이다. 인류사는 개인의 몸을 공동의 구속으로 함께 관리하는 방향으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켰는데, 그러다보니 자기 자신의 몸조차 남에게 진단받아야 할 정도로 내 몸을 잘 모르는 우리가 되어 버렸다. 시스템이 이를 보완하며 수명과 행복을 증대해 온 것이공동의 구속으로 얻은 효과이지만, 대신에 지구 자연과 교감하며 감성과 감각을 풍성하게 하는 전인적 삶은 개인에게는 거리가 멀어진 옛 기억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지구 자연이 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버린 셈이다. 그런 습관은 자연조차 시스템에 가두고 보려는 태도도 가져왔다. 골목길이 정감 없는 계획도시의 단면이 되어 버린 것도 그런 동반작용 중 하나다.

 

그러나 자연은 언제나 개인의 삶터이자 인류의 성장 배경이며 몸과 정신이 행복을 꿈꿀 수 있는 터전이다. 옛 사람들이 고민하지 않고 누렸던 이 자연과의 교감이 도시화 이후 우리는 끊임없이 제한받고 단절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이 천연을 닮은 자연을 찾아 도시의 밖으로 걷기 위해 떠나거나 야영하며 즐기기 위해 나서는 것도 몸이 그리워하는 자연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닌가 싶다. 우리시대의 이것을복고주의 자연풍이라고 따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제임스 러브록은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신체의 무의식적 지혜를 역설한 바 있다.

 

니체처럼 몸과 자연이 교감하며 보여주는 삶의 풍성함은 예술가들에게 많이 나타난다. 예민한 감성은 아무래도 예술가에게 더 많기 때문이리라. 그 중 장욱진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자. “기름은 아무데서나 아무 시간이나 할 수 있어요. 먹은 그렇지 않아요. 먹은 딱 장소가 있어요. 그리고 시간이 정해졌어요.” 그에게는 매체에 따라 작품이 되는 장소와 시간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곳과 곧이 따로 있다는 장욱진의 이야기는 전문가라면 두고두고 곱씹어야 한다.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며, 그러할 때 몸으로부터의 자연이 지구 자연과 네트워킹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곳과 곧의 자연은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되곤 하는데 대표적으로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는 그것을산처럼 생각하기(thinking like a mountain)”라고 표현한다. 여기에는 인간이 산과 달라서 자연의 숨겨진 의미를 거의 파악할 수 없음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이야기를 위해 지구 자연의 곳과 곧을 잘 살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늑대와 산만 아는 자연에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야 할 테니까.

 


 

“수줍음의 틈”: 늑대와 산처럼 생각하기

 

여전히 우리에게 자연은 인간 외적 시련 조건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 자연에 인간이 적용해온 방식은 그것을 보는 관점과 조건에 따라 문화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흔히 우리는 이렇게 형성된 습관적 자연을 자연관이라 구별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에는 그렇게 뭉뚱그릴 수 없는 수많은 관점이 있다. 노자는하늘과 땅 사이, 그것은 풀무와 피리 속 같지 않은가. 비어 있으나 구부러지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 많은 소리가 생겨난다.”며 관습이 된 자연에 반대한다.

 

우리는 잘 못 느끼지만 자연 속에는 묘한 경쟁과 공존을 보여주는수줍음의 틈이라는 것이 있다. 원시림의 다자란 나무들은 그들끼리 공간을 조정하면서 잎을 틔우는데, 나무들끼리 공간을 차지하고 남은 빈틈을 그렇게 부른다. 처음으로 그렇게 부른 학자는 자연의 이야기를 그렇게 감성적으로 읽은 것이리라. 이처럼 나무들끼리의 치열한 자리다툼에서도 이야기를 찾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자연과 교감하며 자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 것도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렇게 자연의 일부로서 이 지구 정원의 일원이다.

 

떼어진 자연이 아니라 함께하는 자연으로서 인간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자연의 시련이 삶터의 하나이자 정원의 이야기로 변신하게 될 것이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잃어버린 그것을 되찾고자 노력해야 하며, 전문가로서의 우리는 그것을 지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때다. 한 가지 가능성은 도시와 농촌에서 되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게오르그 짐멜에 따르면 같은 시대를 사는 시골사람과 도시사람 사이에는 눈에 띠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시골에서 형성된 내면세계와 도시에서 형성된 내면세계가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연과 함께 성장한 몸 자연이 고스란히 담긴 내면은 분명 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시인 정지용은 그것을흙에서 자란 내 마음이라며 자연과 하나 되었던 시절의 향수를 노래하기도 했었다. 시골사람들은 흙(자연)에서 자랐기 때문에늑대와 저 산만이 알고 있는 것”, 산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지만 지금의 도시사람들은 거의 알지 못하는 그 뜻에 눈 둘 줄 아는 것이다. 자연을 다루는 전문가라면 최소한 이것을 성찰하고 생태를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곁가지로 함께 생각할 것은 지구 정원, “자연적 삶을 갈구하는 수많은 구호들이 사회적 불평등과 연관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소로우도 따지고 보면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월든 호수 곁에서 자연에 흠뻑 취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 정원을 강조하는 입장은 니체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기본으로 한다. “형제들이여, 맹세코 이 대지에 충실하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이 대지는 그런 자들에게 지쳐있다.” 지구 정원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도 우리 몸 자연으로부터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자연의 본질은 시간에 있다는 것. 자연은 공간에 그 본성을 두지 않는다는 것. 전문가라면 이것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제임스 코너가 말하듯진정한 생태적(자연적) 조경이란 완결적이고 완벽한 작품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과정’, ‘전략’, ‘계기를 마련하는 디자인이다.”라는 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고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연재필자 _ 안명준 조경비평가  ·  환경조경나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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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lusgan@gmail.com
사진 _ 나창호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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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_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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