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예술_생각의 에코톤: 테크네의 장소성, ‘예술’(下)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_8회
라펜트l안명준 조경비평가l기사입력2013-06-21

“조경 예술”: 이론과 실천의 에코톤(ecotone)

 

우리시대 미학자는현대 미술은예술의 정의자체를 주체화한다고 말한다. 이것이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언제 예술인가?”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고 강조하면서. 단토의 단정적 표현에 대한 답변이라고나 할까, 현대 미술과 미술이론은 이미 새로운 전환을 모색한지 오래다.

 

그렇다면 조경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조경은 예술로부터 어떤 위상을 가지는가? 좀 더 쉽게 우리는조경예술(예술이 되는 조경? 예술의 수준에 도달한 조경?)과 경관/풍경예술(예술작품이 되는 경관과 풍경?)”이라는 것을 현대 사회에서 강조할 수 있을까?

 

중요한 점은 아직 우리에게 조경에서 말할 수 있는 예술에 대해 어떤 공통된 개념과 대상을 지적할 수 없지 않나 하는 것이다. 예술을 흉내 낸 조경이라거나 예술을 지향하는 조경은 몇몇 사례를 통해 나타나는 것 같지만 과연 그것으로 현대 미술이 보여주는 예술의 범주를 이야기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라는 것이다. 1980년대 표현 중심의 조경가들에게서 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이 먼저 강조된 조경이 나타났던 적도 있지만, 그것이 조경예술의 전형이 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아름다움이 팔린다.”는 현대 비평가의 지적은 조경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조경이 예술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보다는 조경이 어떤 아름다움을 만드는가가 더 중요해진 시기임을 먼저 고민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뀌어야 하고, 그것은조경은 어떤 아름다움을 좇아야 하는가?’ 정도가 될 것이다.

 

이것은 조경이예술의 비인간화를 가속화하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아름다움을 좇아야 하는가와 관련된다. 지난 시대재현, 표현, 형식, 제도의 틀이 아니라 그보다 더 본질적인 조경 행위의 지향을 우리는 밝혔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예술의 순수주의, 순수성과는 거리가 있는 분야라는 점도 잊지 않고 고민되었어야 한다. 예술이 어떤 식의 수식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창조성과 순수성에 관련된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할 것이지만, 조경은 그와 비슷한 수준의 창조적 실천의 입장을 취할 수는 없는 일이며, 우리시대 예술의 일부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뭔가 부단한 고민과 대답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확대된 조경 실천의 양상으로 볼 때 현대 조경은 은유적으로 이론과 실천을 곡예 하듯 넘나드는행동의 에코톤이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예술가의 예술혼과 장인(기술자)의 장인정신을 동시에 지향하며 조경의 스펙트럼을 확대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수많은 단계와 방향을 가지는 조경이라는생각의 기술이 더 적합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에코톤을 형성하는 것과 같음을 말함이다.

 

사실 질문의 답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의미 있는 질문이었음은 곱씹을수록 드러나지 않을까. “예술의 지위는 장소가 아닌 작품의 질이 결정한다.”, “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디자인된 광고, 포스터, 인쇄물은 하나의 조각과 같이 진정한 예술이라는 등 희망의 메시지들이 있음을 상기한다면 답을 얻을 가능성도 희망적이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조경이 창의성을 추구하는 순수한 예술로 확정된다는 것은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조경 활동이 수많은 창의적 아이디어들 속에서 현시대에 적합한 것을 찾아가는 시행착오의 하나로 여기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조경을 예술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그 생각을 실천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나약한 조경 개념을 강하게 하고, 앞으로 형성될 새로운 조경 개념들을 배태하는 이론과 실천의 에코톤을 풍부하게 하는 것과 같다.

 


베이징 798예술지구

 

우리시대 예술과 기술: 테크네 복원의 기로

 

예술에 관한 논의 중에는 조경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조경이 공공에 대한 서비스로서 시작된 인간 활동이라는 점에 정위치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이것은 장기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창조 정신을 활발하게 만드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예시한다. “얼룩으로 더렵혀진 벽이나 색깔이 고르지 않은 돌을 쳐다보도록 하라. 어떤 배경을 창조해야 할 때, 그대는 이런 것들 안에서 산이 있고, 폐허가 있고, 바위, 나무, 거대한 평원, 언덕과 계곡들이 있는 신성한 풍경과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그대는 그 안에서 싸움터와 격렬하게 움직이는 이상한 인체들, 얼굴 표정, 옷자락 그리고 수많은 다른 물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모든 것들을 그들 본연의 완벽하고 적절한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으리라. 이러한 벽들의 작용은 종소리의 경우와 같아서, 그 울리는 소리 가운데에서 그대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언어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빈치가 강조하는 창조 정신은 그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 예술과 기술이 동시할 때 가능하다. 우리시대에 예술과 기술은 그러나 너무 멀리 각자의 길로 나아가 버렸다. 각자 먼 길의 끝이 보이는 것일까, 깊이로만 향하던 그 둘 사이에서 새로운 전환까지 다방면에서 모색되고 있다. 여기에 오래 되었지만 새로운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

 

철학자들은 지적한다. 과학과 기술이 비대해진 오늘날, 예술과 이야기가 풍부하게 펼쳐지며 잊힌 테크네를 복원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말이다. 조경은 예술보다 먼저 행동의 에코톤을 실천해온 분야로서 테크네 복원의 기로에 선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디자인 분야가 산업화 이후 근대를 이끌었던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인류 진화를 담당하게 될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조경은 그만큼 중요한 새시대의 실천으로서 필수가 되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오래된 말 테크네(techne, ars)는 무엇인가? 테크네의 본질적 개념은보편적 지식과 그것의실천적 적용이라는 데에 있다. 테크네는 근본적으로 통합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이며, “근거 있는 지식과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 --의 통합을 지향한다. 테크네란 전문지식을 바탕으로사물에 대한 일반 규칙과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하는 활동이다. 오늘날 예술과 기술로 나뉘며 분화된 것과는 반대 방향의 실천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분업화와 전문화로 분석의 시각만을 가지게 된 우리에게 전체와 모두를 보고 한 번에 다룰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조경 또한 그런 활동의 하나로서 이성적 제작 능력과 다르지 않으며, 동시에 창조적 상상을 포함하는 총체적 활동으로 예술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 조경은 아직까지 세분된 전문 기술 분야들과는 다른 총체성이 농후한 분야여서 예술인지, 기술인지 분명하게 자리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한때 조경을종합과학예술이라 정의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우리는 이 정의를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러한 문제의식에 복원되는 테크네 개념이 힌트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할 때이다. “이상적인 비평가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최고의 안내자라 했던가, 조경미학, 조경비평의 활약이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연재필자 _ 안명준 조경비평가  ·  환경조경나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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