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생태문화] 기념묘원 레꼴레따

남미생태문화 탐방, 세상에 없는 경험, 우연히 발견한 즐거움 - 11
라펜트l박미옥 교수l기사입력2017-02-01
Human Nature & Culture 남미생태문화 탐방기
세상에 없는 경험, 우연히 발견한 즐거움 - 11

기념묘원 레꼴레따




글·사진_박미옥 오피니언리더

나사렛대학교 교수





레꼴레따 정문. 주님을 기다리며(expectamus dominum)


레꼴레따(La Recoleta Cemetery)

세계에서 가장 예술적인 묘지 레꼴레따. 망자를 위한 화려한 영혼의 안식처이다. 이곳은 원래 수도승들이 채소를 기르던 실용정원이었으나 1822년 교회 내 시신 안치가 금지되면서 부유층을 중심으로 레꼴레따에 조상들을 안치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은 1,500㎡의 면적에 총 6,400개의 크고 작은 묘지가 있다. 에바페론과 역대 대통령 13인을 포함한 독립영웅과 과학자, 작가 등 여러 유명 인사들과 갑부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중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70여개의 묘는 예술적 우수성을 평가받아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어 있다. 조각 작품들은 아르데코, 아르누보, 바로크, 신고딕 등 시대적 유행을 반영한 다양한 양식을 담고 있다. 유럽 대가들의 조각품을 비롯해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해외에서 수입한 대리석을 사용했다. 수많은 종교적 장식품과 화려한 조각품들로 장식되어 있어 웬만한 아파트값 한 채와 같다. 묘지는 언제든 사고 팔 수 있어 신흥부자들이 부를 과시하기 위해 사들이기도 하며 일부는 시에서 관리한다고 한다. 가족 묘소에는 지하 5m까지 여러 층의 공간을 만들어 납골당에 안치한다.


레꼴레따 안내도. 에바페론은 88번


Requiescant in pace(편안히 쉬소서, 고이 잠드소서...)

레꼴레따는 라플라타강 가까이에 위치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세워질 무렵부터 ‘옴부나무 별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소유주 후안 데 나르보나가 스페인 사라고사의 필라르 성모에게 바친다는 조건으로 땅을 기증했고, 1732년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레콜레 형제회가 필라르의 성모 교회 (Basílica Nuestra Señora del Pilar)와 수도원을 세우면서 레콜레타로 부르게 됐다. 1821년 총독 마르틴 로드리게스는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수도회를 몰아내고 수도원의 땅을 몰수하여 공공묘지로 만들었다.

묘지라기엔 너무 화려하고 아름다운 레꼴레따, 그 한 곳에 아르헨티나 민중의 성모 에비타가 잠들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대통령을 지낸 후안 도밍고 페론의 두 번째 부인으로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온갖 역경을 딛고 전설적인 퍼스트레이디가 된 에바페론 에비타의 시신은 죽은 지 24년 만에 이곳 가족 묘역으로 옮겨졌다.

묘지입구 공원에는 고무나무 노거수 거목이 자리 잡고 있다. 수령 250년 남짓한 거목으로서 워낙 크고 무거워 스스로는 버틸 수 없다보니 막강한 힘을 가진 신화 속 인물 헤라클레스(Hercules)의 도움을 받고서야 비로소 지탱할 수 있다.


헤라클레스가 받치고 있는 노거수(좌)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Don't Cry for Me Argentina
나는 그칠 줄 모르고 내 인생을 불태울 욕망을 느낀다.
그것을 태움으로써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행복과 길을 밝힐 수 있다.
영광에 대한 나의 희망을 품는다.
내가 원하는 유일한 것은 겸손함과 노동자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I feel the irrepressible desire to burn my life.
If by burning it could light the way and the happiness of the Argentine people.
I hold my hope for glory.
The only thing I want is to serve to the humble and to the workers.
아르헨티나의 성녀로서 국민들의 연인으로 추앙받는, 한편으로 아르헨티나를 몰락케 한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로 비난받는,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María Eva Duarte de Perón; 에바페론; 에비타)의 묘비에 새겨진 추모의 글이다.


에바페론 묘소는 늘 장미와 사랑의 편지로 장식되어 있다

에바페론 에비타, 죽은 지 5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의 묘지에는 참배객과 꽃장식이 끊이지 않는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사랑했던 그는 복지정책을 펼치지만 결국 아르헨티나를 몰락시킨 원인의 하나였다는 평가도 함께 받고 있다. 에비타는 빼어난 미모와 억압받는 노동자와 빈민, 여성의 대변자로 남편과 함께 노동자와 서민들을 위해 파격적인 복지 정책을 내놓아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성녀’로 존경받으며 아르헨티나의 국민적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권유지를 위해 소위 파퓰리즘(populism)의 선심성 정책으로 나라 경제를 피폐하게 만든  장본인으로서 사치스런 생활에 젖어있고 남편 후안 페론과 자신의 우상화 작업으로 아르헨티나가 몰락한 계기가 되었다는 (어쩌면 서구사회와 정적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한) 부정적 평가를 함께 받고 있다.


에바페론(에비타)

1919년 세계적인 대평원 곡창지대인 팜파스의 시골마을 로스톨도스(Los Toldos)에서 농장 주인과 농장 요리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 아이로 태어나 유년기를 무척 불운하게 보낸 에바페론은 생활고를 벗어나고자 새로운 삶을 찾아 수도인 꿈의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무작정 상경하였다. 그의 나이 불과 15살 때였다. 에바는 하루 세끼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름다움을 무기로 싸구려 잡지의 싸구려 모델로 활동하면서 알려지지 않은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고,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남자들의 품을 포함하여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에바의 정적들은 훗날 그녀를 ‘더러운 창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 무렵 연예인으로서 어느 정도 입지를 굳힌 에바는 군사정부의 유력자인 후안 페론을 만나 그의 후원으로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

1930년대 후안 페론은 이탈리아에 주재하는 아르헨티나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면서 파시즘에 매료되었고, 1943년 민족주의적 성향의 소장파 장교가 중심이 된 통일장교단 소속으로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쟁취하였다. 이후 정치가로서 실질적인 실권을 장악하여 독일 나치당이나 이탈리아 파시당과 같은 국가사회주의(Staatssozialismus)적인 전체주의 사상을 추구하여 빈민들에게 고임금을 보장하고 토지를 공급하는 등 복지지향적인 사회보장제도를 약속하면서 소위 페론주의를 대두시켰으며 점차 하층민의 영웅으로 등장하였다. 이렇게 승승장구 하던 후안 페론이 정치적 타격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출신 성분의 에비타와 만나 새로운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후안 페론의 정치적 역량이 확장되는 것에 위협을 느낀 권력 기관과 군인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후안 페론을 체포 연금하자 타고난 미모와 달변을 가진 에바 페론을 비롯한 페론의 추종 세력들은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마침내 노조 총파업을 유도해낸다.

“나 역시 당신들과 같은 하층민 출신입니다. 우리 가난한 자들과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 미국으로부터 자유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후안 페론뿐입니다”라고 국민들을 설득하여 노조 총파업을 이끌어 내었고 후안 페론은 석방되어 정치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 준 에바의 희생적 노력에 감동과 사랑과 신뢰를 느낀 후안 페론은 죽는 날까지 함께 하기를 맹세하고 결혼하여 두 번째 부인이 된다. 페론의 석방운동은 1945년 9월 17일 민중혁명으로 이어져, 1946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추대되고 마침내 에바페론은 비참한 신분에서 고귀한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로 등극한다.

페로니즘은 1946년부터 실시되어 모든 사회 집단을 개별적 조직으로 조직화하였으며 초기 5개년 계획으로 모든 조직들을 정부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통합하였다. 파시스트적인 전체주의를 국가사회주의 사상으로 도입하여 철도 등 국가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여 외국 회사들을 추방하고 자본을 몰수하는 등 아르헨티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였다. 나아가 에비타의 의지를 반영하여 노동자와 여성 등 사회적 역사를 보장하기 위한 노동입법, 여성법, 혼인법, 남녀평등법, 이혼법,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 공공사업의 추진, 교육개혁법 등을 추진하여 아르헨티나의 성녀로 추앙받는 등 하층민들에게 열광적인 환호와 사랑을 받았다. 1952년 에바는 백혈병과 자궁암으로 쓰러져 33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는데 페론 집안의 반대로 가족 납골당에 묻히지 못하고 레꼴레따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르헨티나 서민들의 가슴에 꽃으로 남았다.

페론집안이 아닌 친정집 가족 묘에 안치됨






각양각색 형태 무덤인지 예술적 조각품인지....

_ 박미옥 교수  ·  나사렛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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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flower@kor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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