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생태문화] 성스러운 계곡(Sacred Valley)

남미생태문화 탐방, 세상에 없는 경험, 우연히 발견한 즐거움 - 25
라펜트l박미옥 교수l기사입력2017-05-28
Human Nature & Culture 남미생태문화 탐방기
세상에 없는 경험, 우연히 발견한 즐거움 - 25

성스러운 계곡(Sacred Valley)




글·사진_박미옥 오피니언리더

나사렛대학교 교수



세계의 중심, 잉카문명이 시작되고 전성기를 누렸던 쿠스코는 상당부분 파괴되고 새로운 도시로 바뀌었지만 그 흔적과 숨길을 통해 여전히 잉카의 한복판에 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곳곳에 서있는 동상과 태양의 신전, 잉카 신전들, 골목길과 낡은 지붕에서 잉카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잉카의 배꼽을 떠난 우리 일행은 그 옛날 침략자들의 말발굽을 피해 임시로 머무르며 저항운동을 이끌었던, 지금은 성스러운 계곡 또는 신성한 계곡으로 알려진 우르밤바와 오얀따이땀보 일대 계곡을 향했다.

원래 잉카라는 말은 국가 명칭이 아니라 귀족계급 사람들을 지칭한다.


성스러운 계곡(Valle Segrado),
잉카 최후의 항전 빌카밤바(Vilcabamba; Willkapampa)

성스러운 계곡은 일명 신성한 계곡으로 불리며 쿠스쿠에서 마추픽추 사이의 우르밤바강 계곡 유적지를 일컫는 말이다. 케추아어로 성스러운 계곡이라는 뜻의 우르밤바(Urubamba)를 중심으로 피삭(Pisaq)에서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 그리고 친체로(Chinchero) 일대를 포함하며, 잉카의 저항운동이 있었던 근거지 중 하나라고 한다. 


성스러운 계곡

잉카제국 성립

잉카의 신비는 황금도시 엘도라도와 파이치치로 인해 더욱 신비롭게 다가온다. 잉카족은 13세기경 망코카팍이 쿠스코에 정착하여 태양의 신전을 축조하면서 시작되었다. 잉카족은 남방의 아이마라족이나 북방의 창카족 같이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페루 원주민이다.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잉카의 전성기를 열었던 파차쿠티왕이 최강의 부족이었던 창카족과의 전쟁에서 이겨 중부 페루고원까지 손에 넣었다. 파차쿠티왕 사후 투팍잉카 유팡키 황제는 지금의 에콰도르 지방과 칠레, 아르헨티나 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잉카제국을 완성하였다. 

잉카 지역에는 기원전 11000년 무렵부터 원주민이 정착해 BC 1250년경에 안데스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부족국가의 형태를 이루었다. 빈족, 치무족, 나스카족 등이 분포하며 우리나라 삼국시대인 서기 600년경 우아리족이 약 300년에 걸쳐 지배하다가 서기 900년 무렵 춘추전국시대로 나뉘었다. 1370년 치무족이 지배하다가 1438년 창카족이 잉카족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잉카족이 모두를 물리치고 1430-1532년에 걸쳐 대제국 잉카제국을 이루게 된다.


아타우알파의 체포(Captura de Atahualpa) (카하마르카 전투(Batalla de Cajamarca))

남미대륙의 국경을 결정하게 되었던 몇 가지 결정적인 사건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지금 잉카의 운명을 결정했던 또 다른 사건, 즉 200명이 채 안 되는 스페인 군대가 10만 대군의 잉카를 짓밟은 사건을 ‘카하마르카 전투(Batalla de Cajamarca)’라고 부르며, 일명 ‘아타우알파의 체포(Captura de Atahualpa)’라고도 부른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피사로가 이 지역을 탐험하면서 천연두가 전파되었고 위아이나까빡 황제가 죽게 되자 형제간 왕위계승전쟁이 벌어지며 잉카는 분열된다. 1532년 형제지간인 아타우알파와 우아스카르 사이에 치열한 내전이 아타우알파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처 정비도 되기 전인 1532년 11월 5일, 프란시스코 피사로를 비롯한 스페인 일행을 접견하였다. 

잉카의 창조신 비라코차와 오얀따이땀보 인근 계곡의 바위에 새겨진 비라코차 얼굴(자료: wikipedia)

잉카인들이 처음 스페인인들과 마주했을 때, 이들을 잉카의 수호신 비라코차(Viracocha)의 화신으로 여기고 섬겼다고 한다. 잉카의 전설에 의하면 비라코차는 피부가 희고 키가 컸으며 턱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비라코차는 늘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잉카 사람들에게 의학·농업·공학과 건축학 등 다채로운 학문을 전수해 주었는데, 어느 날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제자들을 이끌고 태평양을 건너갔다고 전한다. 참고로 노르웨이의 헤이어달과 같은 사람들은 이스터섬 등 남태평양의 신화 속 태양의 아들 티키(tiki)가 콘티키(비라코차의 다른 이름)와 같은 인물이며 남미의 고대 문명이 남태평양 문명의 원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처음 만난 유럽인과 그들이 타고 온 말을 보며 신기해했던 아타우알파가 그 다음날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가마를 탄 채 스페인 막사에 방문하면서부터 잉카의 운명을 가르게 된 ‘카하마르카 전투’ 사건이 시작되었다. 잉카 황제의 방문을 맞아 스페인 신부 발베르데는 그들의 매뉴얼에 따라 의무적으로 소위 ‘레케리미엔토(Requerimiento)’라고 하는 스페인 국왕의 조서를 읽어주게 된다. 조서의 내용은 그 땅을 스페인 왕이 지배한다는 내용이지만 당연히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아타우알파는 발베르데가 들고 있던 성경책(기도서라고도 한다)을 넘겨보다가 난생처음 보는 책과 문자에 자존심이 상해 책을 집어던지며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에 당황한 스페인군은 잉카의 대군에 대한 공포감에 선제공격하여 황제를 기습적으로 체포하고 황제를 수행하고 온 잉카군대를 쫓으며 도륙하였다.

포로가 된 아타우알파는 스페인 군에게 자기가 잡혀있던 방의 부피만큼 금과 은을 줄 테니 풀어달라는 제안을 하였고 잡혀있는 동안 스페인인들과 어느 정도 우호적인 관계도 유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약 반년 후 약속대로 방안 가득히 들어 찬 금은보화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스페인인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고, 황제와 스페인군 사이에도 불신과 갈등이 일었다. 마침내 안타깝게도 아타우알파를 근친상간, 일부다처제 등의 죄목으로 처형을 당하였다.


잉카 최후의 전쟁

아타우알파를 처형한 스페인군은 그의 동생 투팍 우알파를 왕으로 세웠으나 2개월 만에 사망하였고, 다시 17세의 어린 동생인 망코 유판키(Manco Inca Yupanqui)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웠다. 스페인군에 의해 황제가 된 망코는 스페인군의 도움으로 내부의 반대세력과 외부의 적대적 부족들을 정리하고 옛 잉카제국의 세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고, 정복자들에 대해서 상당히 신뢰감을 갖고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새로운 도시 리마를 건설하기 위해 떠난 후, 그의 어린 동생들인 곤살로와 후안으로부터 재물과 여자를 약탈당하였고, 심지어 황후를 비롯한 부인들까지 온갖 시련과 모욕을 당하였다. 탈출을 결심하였으나 오히려 들켜서 감금당하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 큰 수모를 당하게 된다.

1536년 2월 피사로 가문의 둘째인 에르난도가 스페인에 머물다가 잉카로 다시 돌아온 후 납치 감금되었던 망코잉카와 부인들을 석방하고 사과하는 등 황제로 대우한다. 민심을 수습하고 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나 마음을 돌이키지는 못하여 결국 망코잉카는 스페인 점령지인 쿠스코를 탈출하여 성스러운 계곡의 오얀타이탐보를 근거지로 저항운동을 시작하였다.
 

쿠스코 공성전(Sitio del Cuzco, Cerco del Cuzco)

1537년, 황제 망코는 수도 쿠스코를 되찾기 위해 10-20만 대군을 이끌고 쿠스코를 포위하여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쿠스코의 스페인군은 196명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원주민과 아프리카와 중미에서 온 하인들이 전부였지만 강력한 최신 무기를 갖춘 스페인군과 재래식 무기로 맞선 잉카군은 전면전에서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스페인군들은 전략적 요충지 삭사이와만을 점령하여 잉카군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삭사이와만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후안피사로를 포함한 다수의 스페인군이 전사하는 등 스페인측의 피해도 있었으나 잉카인은 3천명 이상이 전사하고 끝내 삭사이와만을 스페인군에게 내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스페인군은 삭사이와만을 근거로 잉카인들의 포위에 맞서 10개월을 버티며 최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


키소 유판키(Quizu Yupanqui)와 오얀타이탐보 전투(Batalla de Ollantaytambo)

이 시기의 여러 전투에서 잉카군이 항상 패배한 것은 아니다. 쿠스코 스페인군을 돕기 위해 리마에서 파병된 스페인 지원군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던 키소 유판키 장군의 활약으로 외부 지원으로부터 쿠스코 스페인군을 고립시킬 수 있었고, 1537년에는 에르난도 피사로의 지휘로 저항운동의 근거지 오얀타이탐보를 기습한 스페인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혀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작은 승리가 결국 잉카인들의 전세 판단을 왜곡시켜 최후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오얀타이탐보에서 승리한 망코잉카는 키소 유판키에게 리마를 공격도록 명령하였지만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부인(아타우알파의 여동생)을 지원하는 약 2만 명의 잉카 부족 지원군이 파견되었고, 선봉에 섰던 유판키가 스페인군의 공격으로 먼저 사망하게 되면서 리마 점령은 실패로 돌아갔다. 쿠스코의 스페인군은 일정 부분 외부의 지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최후의 수도 빌카밤바(Vilcabamba)

쿠스코포위전이 시작된 지 10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 칠레쪽으로 원정 나갔던 스페인군이 복귀하면서 일시적인 스페인군 사이의 내분을 이용하려 했던 망코잉카의 시도가 실패하게 되었다. 결국 포위했던 잉카의 군대를 해산하고 잉카 4개 지역의 하나인 동부 안티수유 깊은 계곡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이곳마저도 스페인군의 추적으로 위험해졌다고 판단한 망코잉카는 마침내 1539년 잉카인들을 이끌고 험준한 골짜기에 망명정부를 수립한다. 이곳이 빌카밤바(Vilcabamba; 케추아어로 Willkapampa)이다.

빌카밤바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의 신성한 계곡 일대라는 설과 에코도르에 위치한다는 설이 있다. 뒤에 소개할 마추픽추의 잃어버린 도시는 잉카의 마지막 수도 빌카밤바를 찾으러 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다고 한다. 약 40년간 망명정부가 지속되었으나 1572년 빌카밤바가 함락되고 마지막 황제 아마루가 체포되어 처형되면서 그 화려했던 제국의 영화로운 운명을 마치고 말았다.



살리나스 (염전; Sallinas)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이고 특히 서해안은 넓은 갯벌과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천일염을 생산하는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에 반해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소금광산, 폴란드 비엘리츠카, 중국 차마고도 등은 내륙의 암반이지만 사막, 우물 등 독특한 소금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 성스러운 계곡의 해발 3000m 고산지역의 마라스(Maras) 마을에는 살리나스 염전이 자리 잡고 있다. 살리나스는 스페인어로 염전이라는 의미이다.

베로니카를 배경으로 한 살리나스염전 전경


살리나스의 아름다운 전경

까마득한 옛날 안데스 산맥은 바다 속에 있었으나 어느 날 태평양 속의 큰 대륙 태평양판과 남미대륙의 남아메리카판이 충돌하면서 남미 해저가 융기하여 지금과 같은 고산 산줄기를 이루었다. 땅속 지층에는 그때의 소금이 굳은 암염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그 충돌로 인한 융기현상은 지금도 진행형이어서 이 일대에는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안데스 고산지대의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그 물줄기가 암염층을 통과하면서 짠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미 잉카문화 이전부터 시작되어 잉카인들에게 비법이 전수되었다. 잉카인들은 이 소금물을 이용하여 좁은 계곡에 계단밭 형태의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였는데, 이곳 살리나스에서는 아직도 잉카시대와 똑같은 방법을 이용해 소금을 채취하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떫거나 쓴맛이 없고 다양한 무기질 성분이 포함되어 아토피성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계곡 상부로부터 작은 물줄기가 도랑처럼 계곡 쪽으로 흘러내려와 마치 다랑이논과도 같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계단식 소금밭에 거미줄처럼 얽혀 골고루 분산된다. 다양한 크기의 소금밭이 1500개 이상 차곡차곡 쌓여있다.


살리나스 염전의 소금 캐는 아낙


살리나스로 유입되는 염수 실개천


살리나스 염전의 상품


살리나스 염전 소금 결정체


모라이 (moray)
고산지대로 이루어진 잉카제국에서 약 12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할 수 있었을까? 물과 식량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 비밀 중 하나는 이곳 성스러운 계곡의 모라이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모라이. 계단식 농사법 연구소(자료: Wikipedia)

구글위성영상으로 본 모라이

모라이는 1931년 미국의 지질학자인 로버트 시피(Robert Shippee)와 미국 해군 조종사 존슨(George Johnson)이 안데스산맥의 항공사진을 촬영하던 도중 발견하였다. 모라이는 직경 50-120m에 이르는 계단식 동심원으로 이루어진 4개의 원뿔형 지형으로서 초기에는 원형극장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결론에 의하면 모라이는 잉카의 농사법 연구소로서 우리의 농촌진흥청 농업기술연구소에 해당된다. 잉카의 본거지인 고산지대에서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저지대 곡물이 고산지대에서도 자랄 수 있도록 연구했던 시설로 알려져 있다. 12층의 원형계단식 밭의 각 층은 2m가 넘고, 층을 오르내릴 수 있게 층마다 돌출 계단 4개가 지그재그로 박혀 있었다.

맨 아래층에 옥수수를 심어 옥수수가 자라면 그 씨를 위층에 심고, 또다시 그 씨를 위층에 심어 경작하는 방식으로 농작물을 고도에 적응시켰다고 하며, 안데스의 만년설이 녹은 물을 모아 수로를 통해 밭에 공급하는 관개시스템을 구축했다. 가장 깊은 원형의 바닥에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고 우물터도 있다.

바람과 태양에 대한 깊이, 디자인 및 방향에 따라 상단과 하단 사이의 온도 차이가 15°C가 되어 온도 차이에 의해 작물에 다른 기후 조건의 영향을 연구한 곳이다. 미기상 등 중요한 특성이 인간 소비를 위해 변경되거나 적응된 야생식물 종의 가축화, 순응화 및 잡종화에 대한 고대 연구의 중심지이다. 규모에 따라 큰 원은 태양을 작은 원은 달을 각각 의미한다.

그런 한편으로 모라이가 실제로 농업용 온실이 아니라 종교 및 의식의 중심지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1532년에 스페인 침략에 의해 정복되면서 중단된 이후 현재까지 미완성 상태로 남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안데스 고산지대 풍경
안데스(la cordillera de los Andes)... 
케츄아어로 안티수유라 부르는 안데스는 남미의 서해안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북으로 병풍처럼 두르며 북쪽으로 파나마로부터 남쪽으로는 아르헨티나의 티에라델 푸에고까지 약 7000㎞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산줄기이다.

안데스라는 용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케츄아어의 안티수유(동쪽 잉카제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안데스는 남미 7개국(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을 통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진다. 아마존 열대우림을 존재하게 하는 아마존강이 안데스의 빙하와 눈이 녹은 물에서 시작된다. 평균 해발고도 4000m에 이르는 고산지대로서 지난 글에 소개했던 티티카카호가 안데스 최대의 호수이다.
 
북쪽으로 파나마를 거쳐 중미의 시에라마드레 산맥을 거쳐 북미의 로키산맥으로 연결되며, 남쪽으로는 대륙의 끝 드레이크 해협에서 바닷속을 지나 남극대륙의 팔머반도로 이어진다. 곳곳에 활화산이 분포하여 지금도 분출하곤 한다.

이렇게 험준한 안데스의 정상 고원은 평지를 이루고 있다. 기온이 서늘하여 오히려 사람들이 살기 좋은 기후를 나타낸다. 잉카제국을 비롯한 고대 원주민들은 안데스의 고산지대에 부락을 이루며 살아왔다.

잉카의 아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안데스 정상 고원지대는 멀리 베로니카의 만년설을 품으며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평온한 기운으로 우리 일행들을 감싸고 있었다.


안데사 정상부 고원지대 풍경


안데스 고원의 만년설과 자연풍경
글·사진 _ 박미옥 교수  ·  나사렛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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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flower@kor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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