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생태문화] 킬케 문화와 삭사이와만

남미생태문화 탐방, 세상에 없는 경험, 우연히 발견한 즐거움 - 24
라펜트l박미옥 교수l기사입력2017-05-16
Human Nature & Culture 남미생태문화 탐방기
세상에 없는 경험, 우연히 발견한 즐거움 - 24

킬케 문화와 삭사이와만




글·사진_박미옥 오피니언리더

나사렛대학교 교수



쿠스코가 잉카제국의 심장이며 배꼽이라고 한다면 오늘 소개할 삭사이와만은 표범 형상의 쿠스코의 머리에 해당된다. 삭사이와만은 그 규모의 웅장함과 더불어 신전 또는 군사용 목적으로 지어진 미스터리로 가득한 유적이다. 수십 톤에서 수백 톤에 이르는 거대한 암석을 누가, 어디서, 어떻게, 왜, 언제 옮겼는지에 대해 여전히 신비에 쌓여 있다. 


킬케 문화  Killke culture

삭사이와만 위치


위성영상으로 본 삭사이와만 유적지.지그재그형 석벽과 태양신전(muyuqmarka)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임

삭사이와만 요새의 유적을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분석한 결과, 1100년경 킬케 문화시기에 지어진 요새로 판명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삭사이와만의 축조시기에 대한 가설의 하나이며 쿠스코 왕국 이전 쿠스코 지역에서 꽃피웠던 킬케 문화에 대해 살펴본다.

킬케문화는 잉카의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 즉 1200년대 쿠스코 왕국 건국 이전 900~1200년까지 이미 쿠스코 일대에 살던 사람들이 형성했던 문화이다.

2008년 3월 13일, 고고학자들이 고대 사원, 도로, 수도 시설의 유적을 삭사이와만에서 발견하였다. 사원 면적 250㎡, 11개의 방으로 구성되었으며 종교적 목적의 우상이나 미라를 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미루어 짐작하면 삭사이와만 유적은 군사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기능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삭사이와만(Sacsayhuaman)

삭사이와만 준공 기념, 잉카의 후예들

잉카문명은 신비로움과 함께 정교한 석축기술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쿠스코 시내의 12각돌도 그렇거니와 특히 이곳 삭사이와만은 잉카의 석축기술을 집대성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수십~수백 톤의 돌을 바늘(혹은 종잇장, 칼날)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다듬었고, 그것도 지그재그로 쌓았다.


무육마르카(muyuqmarka) 신전 탑


무육마르카(muyuqmarka) 신전 설명


삭사이와만 전경

삭사이와만은 ‘독수리의 왕 Royal Eagle’이라는 의미로서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한동안 가장 유력한 견해는 잉카제국을 열었던 파차쿠니 황제 시대에 축조되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앞에서 간단히 소개한 바와 같이 킬케 문명 시기 또는 쿠스코 왕국이 개국된 시기 전후에 지어졌다는 설이 있으며, 또 다른 설로는 잉카의 전설로 내려오는 설로서 고대문명의 어느 시기에 지어졌다고도 한다. 최근 발굴된 이야기에 의하면 킬케 문명시기 만들어진 것을 잉카제국 시기 더 확충하였다고도 하며,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의 기록에서 삭사이와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어 신비롭다고 한 경우도 있어 여전히 미스터리에 속한다.

우리나라 선조들의 돌 다루는 기술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 삭사이와만과 쿠스코시내 12각돌 등 잉카의 돌 다루는 기술 또한 우리 선조들에게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스톤헨지나 피라미드, 기타 다른 고대 문명의 거석문화와는 또 다른 석축 유적이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잉카인들은 쿠스코를 퓨마의 몸통으로 비유하고 삭사이와만은 머리에 해당된다.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 부분에 난공불락의 견고한 돌 성을 쌓고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장소가 되고 있다. 성벽은 3단으로서 총 길이 1.1㎞에 이른다. 원래는 4-5층이었다고 하며, 정상에는 많은 건물과 태양의 신전으로 추측되는 무육마르카(muyuqmarka) 신전 탑이 있었다. 원래 Myuqmarka는 높이 20m에 이르는 4층탑이다. 첫 번째는 Moyoc Marca(Muyuq Marka)라는 이름의 원형탑으로서 연속적으로 폭이 감소하는 동심원의 테라스에 원추형 천장을 이룬다. 두 번째는 사각형의 Paucar Marca, 세 번째 역시 사각형의 Sacalar Marca (Sallaq Marka) 등이다.

아마도 그 옛날 오직 종교적 신앙심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 등으로 잉카인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하루 2-3만 명 이상이 77년에 걸쳐 동원되어 1508년 완료되었다고 한다. 큰 돌의 무게는 수십 톤에 이르며 특히 가장 큰 돌의 높이 5m에 무게 360톤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도 부근이 아닌 먼 곳으로부터 운송해왔다는 점에서 잉카인들의 역량과 신념이 매우 경이롭기까지 하다. 1950년의 쿠스코를 폐허로 만들었던 대지진에서도 삭사이와만 유적은 굳건했다고 하니 그 정교함이 놀랍다.

1536년 5월 어느 날, 삭사이와만에서는 잉카의 3만 대군이 300여명 남짓한 스페인 군에게 처참하게 살육 당한다. 말과 수레와 진보된 무기를 앞세운 스페인 정예군 앞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잉카의 영광과 함께 사라졌을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여러 가지로 추측하고 있는 하나의 미스터리일 뿐이다. 그리고 웅장했던 삭사이와만의 위층에 있는 가벼운 돌들은 점령군에게 해체되어 그들의 성당과 정부기관과 집과 기념물들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600년이 지난 지금 이 자리에서는 매년 6월 24일 동지에 ‘인티 라이미(Inti Raymi)’라고 불리는 ‘태양의 축제’가 열린다. 잉카제국을 시작했던 파차쿠티 황제 때부터 이어온 태양제로서 화려했던 잉카의 전통을 오늘날 재현하여 잉카의 후예로서의 자존심을 높이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삭사이와만의 이렇게 거대한 구조물은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현재 삭사이와만의 기능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그중 유력한 설은 군사적 요새라는 설과 종교적 신전이었다는 설이다.

전자는 원래 이곳에는 건물과 높은 탑이 있어 적의 침입을 미리 감시하고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군사적 목적인 요새였다는 설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스페인 군대에 짓밟히고 망명정부를 수립하여 저항하던 시기에 망코 잉카가 사파 잉카에 올라 군사적 저항을 하였고 특히 쿠스코에서 대규모 전투를 할 때 이곳 삭사이와만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곳 한가운데 태양신전이 있었고 수천 명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있었다는 점에서 잉카의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전이라는 설이다. 삭사이와만의 별명은 ‘sexy wanan’이다. 원주민들의 발음이 유사하게 들린다고 하여 붙인 별명이다.


삭사이와만은 표범 형상을 한 쿠스코의 머리


삭사이와만 석벽과 구조물의 배치 및 석축 구조도(http://www.ancient-code.com/)


삭사이와만 입구


삭사이와만의 태양신의 후예들. 거대한 돌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있음.

로널드 라이트가 쓴 [빼앗긴 대륙, 아메리카]에 의하면 스페인 군대와 함께 쿠스코에 들어 온 페드로 피사로(피사로의 사촌동생)는 핀(또는 동전) 하나 꼽을 틈도 없이 정교하게 바위를 쌓은 삭사이와만 요새 정상에 두 개의 원형탑이 높게 서있었고 수많은 방에 창, 화살, 투창, 방패 등의 무기들이 쌓여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널드 라이트는 잉카가 힘없이 무너진 것은 스페인 군대와 함께 따라 들어 온 천연두가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천연두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백성들의 신임을 받던 영민한 황제 와이나 카팍이 아들이 함께 죽었고, 왕권을 두고 형제간의 내전을 거쳐 왕위다툼에서 이긴 아타우알파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아타우알파가 피사로에게 속아 포로로 잡히면서 스페인 군대가 잉카군사들을 학살하였다. 1532년 11월의 이 사건을 카하마르카(Cajamarca) 전투라고 한다.

포로로 잡힌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에게 방 하나에 황금을 방 두 개에 은을 가득 채워 준다고 제안하였고 피사로는 금과 은을 받은 후 아타우알파를 살해하고 쿠스코를 점령하였다. 이후 아타우알파의 동생 망쿠 잉카 유팡키가 잉카황제가 되어 스페인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1536년 5월 삭사이와만에서 스페인군대에 포위된 채 식량과 물 부족으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결국 잉카는 일종의 생화학무기인 천연두의 만연과 왕권을 두고 형제간의 내전으로 안에서 무너졌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을 허용했고 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살해되는 어이없는 종말을 맞은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로널트 라이트가 지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외세에 대한 저항]을 읽어보기 바란다.


전 세계인들이 몰려드는 삭사이와만 전경


삭사이만의 복원 상상도


삭사이와만 돌을 운반하는 상상도. 삭사이와만을 내려다 보는 예수상. 성을 오르는 일행.


삭사이와만 예수상 옆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쿠스코 아르마스광장


삭사이와만의 잉카의 후예들
글·사진 _ 박미옥 교수  ·  나사렛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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