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자연_아비투스 지구 ‘자연’: 이야기 정원의 숭고미(上)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_7회
라펜트l안명준 조경비평가, 나창호 기자l기사입력2013-05-24

우리는 자연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은 말없는, 내 쓸모이자 귀찮은 제약 정도로 이해되곤 한다. 자연을 쉽게 다루는 경향도 있다. 치우고 걷어내 새것을 가져다 놓으면 더 좋아질 거라 강변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다행인 점은 이제 지구를 누구나 걱정하며 자연을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 정도는 이견 없이 공유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을 걱정하는 만큼 실천이 충분한지는 모르겠는데, 공유하는 그것이 아는 만큼만, 보고 싶은 만큼만 자연을 한정하기 때문은 아닐까?

 

봉사하지 않는자연

 

누대로 자연은 인간이 극복해야 할 시련이었다. 자연은 인간의 바깥으로서 응당 그래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는 있다지만, 여전히 자연은 인간의 반대편 정도로 편하게 이해되곤 한다.

 

알다시피 자연은 경관(풍경)이라는 다른 관점이 만들어지면서 시련을 주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라는 또 다른 지평을 가지게 되었다. 시련과 감흥이 동시에 존재하는 자연은 그 뒤로도 새로운 발견을 주며 끊임없이 마이크로하게 또는 매크로하게 작용과 반작용의 시소를 계속하고 있는데, 그에 적응하며 인간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진화하기도 하였다.

 

최근까지도 자연은 성장한 인간의먹이(쓸모)’ 정도로 이해되며 수만 년간 지속된 자연의 시련에 앙갚음 받듯 인간에게 시달리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은 인간의 삶의 터전이면서 재료였기 때문이다. 플리니우스(Plinius, 「박물지」)는 자연이자 그 산물인 나무를 보며나무는 삶을 영위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존 이블린(17세기, 영국 문인)물질문화는 나무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아서 스탠디시(17세기, 영국의 농사 저술가)는 당시 삼림의 황폐화를 보며숲이 없으면 왕국도 없다.”, “나무의 부족은 결국 경작지의 극심한 황폐화를 가져온다.”고 경고하기까지 한다. 비옥한 토양과 숲을 가졌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사라진 것도 숲의 황폐화, 즉 자연의 파괴 때문이었다고 지적되곤 한다.

 

자연은 이처럼 최근까지도 쓸모라는 점이 인간에게 우세하였는데 수많은 격언들이 이를 잘 대변해준다. 우상론으로 유명한 16세기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자연을 노예로 만들어 (인류에) 봉사하게 해야 한다.”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 강화를 역설한 바 있다. 자연을 감상의 대상으로 삼던 예술에서도 인간적 측면이 우세하였는데, 20세기 화가인 피카소는자연은 강간당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며 큐비즘의 칼날로 대상을 해체하기도 하였다. 우리의 모더니스트 이상도지구 표면적의 100분의 99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라며 지루한 자연보다는 휘황찬란한 쓸모들의 개발에 경도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인간에게 알아서 봉사하지 않는 자연을 쓸모 있게 다루기 위한 노력들이 지금의 우리와 주변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자연물이라는 물리적 측면’(Natura Naturata, 소산적 자연)자연이라는 이념적 측면’(Natura Naturans, 능산적 자연)이 시련과 쓸모 사이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며 인간의 삶터(도시)를 성장시키고 진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로베르 에나르(Robert Hainard, 스위스 자연주의 학자)의 격언, “자연의 권리란 먹히거나 거름이 되는 것뿐이다. 생명은 쟁취되고 스스로 지켜지는 것이다.”에서처럼 자연은 인간에 대립되는 쓸모만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서부터 자연과 인간의 구분(대립)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전통이 있는데, “천지는 나와 함께 살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다.”라는 장자의 격언이 그것을 대변한다.

 

서양에서 노예였던 자연이 해방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을 넘으면서인데, 수잔 그리핀(Sunsan Griffin)우리는 지구가 우리를 만들었고, 우리의 육체로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자연을 보는 자연이다.”라며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생각하는 급진적인 활동들이 공유되면서였다.

 

최소한 우리는 이제 자연이 인간만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이 인간만을 위해 봉사하게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다.

 


 

습관이 된자연

 

화가 장욱진은 자연을 이렇게 보았다. “보통 자연, 자연 그러는데 자연이라는 게 그래요, , 시시각각 여기서 이렇게 앉아서 보면 뭐가 뭔지 모르지만, 거기 가까이 있으면 아주 또렷해요. 비오는 것도 좋고 바람 부는 것도 좋고, 자연에 접하고 있으면, 제 삼자가 보면 가장 둔하고 미련하고 그래 보이는데 예민한 게 자연이에요, 그 변동이라는 게.” 보는 눈이 달라지면 자연도 이렇게 다르게 다가온다. ‘쓸모를 버리고 보면자연이 몇 가지 습관적인 인식 속에 여전히 갇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첫 번째는 자연이 늘 그대로인 듯 반응과 변화가 느리다는 것이다. 그러나자연 = 느림이라는 고정관념은 의문이 든다. 바쁨은 인간의 몫이고, 한적함은 자연의 몫이라는 고정관념도 살펴보면 근거가 없다. 뒤돌아보면 꽃피어 있는 저 작던 잎사귀가 그것을 증명한다.

 

두 번째는 자연이 직선을 싫어한다거나 정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는 다양한 리듬이 존재하며 그것이 직선이든, 무질서든 상황에 따른 형태를 보여줄 뿐이다. 자연이 직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정관념이다. 작은 자연들에는 직선과 네모, 반복되는 도형들이 오히려 더 많다.

 

세 번째는 자연과 자연물이 수동적이기만 할 것이라는 것이다. 작은 자연만 보고 인지되지 않는 큰 자연은 뒷전이 되기 쉽다. 그러나 자연은 내재 원리에 따라 스스로 움직이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인간이 1인칭이라면 자연은 전지적 시점이자 인간은 서술할 수 없는 2인칭 주인공이다.

 

네 번째는 자연을 보호하고 복원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자연은 모두 이해되거나 모두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고정된 실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개념)이 어렵고 힘든 것이다.

 

이처럼 자연은 조금만 돌아서 보면 관습적이지 않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지식은 그러나 자연을 습관적으로 일정한 규칙이나 틀로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것이 편리하고, 그것이 의지를 잘 구현해주기 때문이다. 쓸모로 보던 자연, 그 때의 관성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알게 모르게 담겨있는 습관들을 걷어낼 때 오롯이 자연이 다가온다. 그렇게 걷어내고 생각을 따라가 보면 자연은 밖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모습과 원리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우리 자신의 몸과 관련된 자연이다.

 

우리가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것은 작은 자연, 몸이다. 몸을 억압하는 문화가 시작되면서 너무 오래 우리는 우리몸 자연에서부터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당연히 몸으로부터 시작되는 자연 이야기가 도시 시대 언젠가부터 깜깜하다. 다소 비약이 있지만 도시가 매정해지고 장소 없는 기계가 된 것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몸에서 시작되는 자연(개념)은 우리 시대에 살펴야 할 첫 번째 출발점이다.

 

습관적으로 보는 자연에 대해 생각의 단초를 몸으로 가져가는 것은 몸이 자연을 가장 잘 보여주고 설명하며 이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생각이 시작될 때 지구 자연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몸살 중인 자연을 보살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펠릭스 가타리가 강조한흐름, 계통, 세계, 영토등 네 가지 차원의 생태철학적 접근이 시작된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_ 안명준 조경비평가  ·  환경조경나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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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lusgan@gmail.com
사진 _ 나창호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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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_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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