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지적 지향성의 ‘예술’과 먼저 가 있는 ″예술″ - 1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라펜트l안명준l기사입력2017-07-21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Part 2: 08 예술(Art) Ⅰ



담지적 지향성의 ‘예술’과 먼저 가 있는 “예술”...

 



_안명준 오피니언리더

조경시공연구소 느티 대표│조경비평가




예술Ⅰ:  황지해 “슈즈트리”, 우리시대 공공예술의 이정표...

 

최근 “슈즈트리(Shoes Tree)”(황지해, 2017)는 논란을 가져왔다. 무엇이 예술인가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니 우리는 그것을 빗겨 생각하자. 그리고 우리는 ‘생활’을 살아가는 존재인 만큼 거기와 연관되는 예술을 먼저 살펴보자. “호화로운 대중(populuxe)”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 지금, 여기의 생활과 예술은 어떠한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는 셈이다. 예술은 그렇게 성장(문화화)하니까.


모두를 위한 예술, ‘수줍음의 틈’
바슐라르는 말한다, “모네가 수련을 바라본 이후 일 드 프랑스의 수련은 이전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강렬해졌다.”고. 시인 김춘수의 “꽃”처럼 누군가 의미를 두고 보아주는 사람이 등장하면 대상(object, work, nature, etc)은 무엇이든 나름의 새로운 경지(경계)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소통과 공감이 본성인 인간에게 빠르게 전수되고 공유된다. 인류에게 예술은 그렇게 성장하며 생활공간을 바꾸어 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장르를 구분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작가이고 전부가 작품인 시대를 살고 있다. 도시는 상품에 지배된 것 같지만 따져보면 예술과 디자인에 지배된 채 아름답게만 아름답게만 변신하고 있다. 그 틈새이자 경계에서도 ‘수줍음의 틈’을 형성하며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적지 않다. 환경미술이라는 장르를 형성하며 작품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이 많은데 최근의 논란은 공공장소 예술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 살펴볼 만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슈즈트리는 일종의 시대적 가교 역할이자 우리 시대 공공성의 단면, 민얼굴을 그대로 보게 해주었다.



황지해, “Shoes Tree”, 2017 ⓒ안명준

미술관에만 있지 않는 예술, 생활공간(삶터)과 공존하는 예술이 우리 도시의 모습이라고 할 때, 개념으로서의 ‘예술’은 이제 인큐베이터 안에만 있지 않다. 잘 살펴보면 거리를 맴도는 예술이 삶터와 삶들을 자극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늘 새로운 예술이 생활을 자극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지는 각 개인의 시야만큼 우리는 삶터를 무자극과 무의미의 공간으로 대하는 태도에 물들어 간다. 아닌가? 정말 아니라고 할 만한가? 그리고 그러한 굳어버린 생각이 슈즈트리 논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도 몇 가지 유형으로 고착된 채...


논란의 풍경들, 저마다의 에코톤
이해와 오해는 다른 길이다. 슈즈트리를 보는 여러 시각에는 공공환경과 환경미술에 대한 다음과 같은 범주의 밑생각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개된 기사를 중심으로 관련 논점을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들은 향후 관련 분야 실천에서 충분히 고민해볼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 공적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해볼 만하다.

첫 번째는 예술의 기능에 대한 실생활 수준의 요청이라고 할 만하다. 예술은 모두를 편안하게 하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것. 표현의 자유와 대중적 이미지 사이에서 줄타기 하듯 논점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이슈를 건드리는 방식이 많다. 그러면서 어떤 면에서는 공공미술의 기능이 시민의 눈높이에 맞아야 한다는 강요까지 은근히 담아낸다. 작품의 의도나 내용은 논점에서 빗겨나 있곤 한다.

두 번째는 현대 예술의 개념과 경향에 대한 부분이다. 공공미술의 기능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현대 미술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몰이해의 논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재료, 본질, 다수의 만족 등 논란의 쟁점들을 짚어낸다. 일견 작가의 편을 드는 듯한 강렬한 인상의 언사들에서 현대 예술에 대한 이해를 먼저 요구하는 것이다. 작품에서 지적되는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작품이 전달하려는 의미와 내용에 먼저 접근할 것을 요청한다. 작품을 작품으로 대해달라는 셈이다.

세 번째는 논란에서 외면 받고 있는 부분을 강조하고 작품에 집중하는 경우이다. 이슈를 자초한 관계자들의 미숙함을 지적하면서도 그보다는 작품에 담긴 의도와 의미를 충실하게 전달하고자 한다. 작품 논란에서 외면된 의도와 내용으로 작품이 담은 것을 보아달라는 또 다른 요청으로 읽힌다. 여기에서는 작품성이나 예술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슈즈트리에 숨은 이야기와 이루어진 활동들을 들춰낼 뿐이다. 그러면서 무엇을 강요하지 않지만 논점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새로운 논점을 던져준다. 아이들과 시민의 참여로 빚어진 경관은 논란의 켜를 달리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실생활 속 시민의 감수성에 편중하는 경우이다. 무뎌진 행정의 감수성을 지적하면서 그 진행의 과정을 짚어보면서도 시민들도 예술을 볼 줄 안다며 “평균적인 대중의 정서”를 강조한다. 예술은 아름다워야 하는데 슈즈트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특수한 몇몇의 경우를 예로 들지만 자극적인 레토릭이 먼저일 뿐 생각의 실마리로 연결되는 않는다. 시민의 감수성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그것부터 따져보게 한다.

다섯 번째는 작품이 대중의 이해를 얻지 못했는데 이를 다른 사례와 비교하며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유사 사례라며 해외의 경우와 비교하거나 시민의 자발성이 드러난 사례를 논하며 그러한 세밀함의 부족을 지적하기도 한다. 작품에 대한 새로운 권유를 하는 셈인데 작품의 방향성을 함께 고민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일견 대상 작품의 취지와 장소 등은 어색하기만 하다. 짧은 글의 특성상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더라도 작품의 성패를 그러한 대중적 참여 기록으로 판단하는 듯하다.

여섯 번째는 레토릭으로만 가득 찬 경우이다. 공공미술로서 실패한 사례라 단정하면서 흔히 듣지 못하는 학술적 개념이 등장하기도 한다. 한 가지 개념으로 설명하다가 관점을 바꾸면 오히려 성공한 사례라고 하기도 하는데 가만히 보면 권위에 위탁한 사고의 흐름이 한 눈에도 불편하기까지 하다. 심지어는 자연 결핍에 의한 본능적 현상의 하나로 연관시키기도 한다. 작품과 작품을 둘러싼 논점에서 벗어난 이와 같은 논의들은 생각을 확장시켜준다는 점에서 그저 재밌다.

짧게 요약해 봤지만 기사에서만 보더라도 슈즈트리를 둘러싼 공공미술 논쟁은 그간 우리가 가져온 예술의 사회적 의미들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논의의 내용이 대부분 누추하다. 섞어서 보았지만 대부분의 논의는 대개 크고 작은 시점과 시각의 차이에서 차별된다. 그 차별이래야 다소의 구별일 뿐 속 깊은 탐색과 천착이 없는 뱉어내기 식 논지가 주를 이룬다. 우리를 보여주거나 우리의 지향을 안내하거나 아니면 우리를 천착하는 시각은 매우 소수일 뿐이다. 이것조차 우리 문화예술의 현주소라고 이해할 만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방식으로 이번에도 황지해 작가는 우리시대 논란들의 경계를 연장하며 예술가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고야 말았다. 감사할 일이다.


아름다움의 각개 전투, 공공미술
논의를 종합해 볼 때 먼저 드는 생각은 그들이 상정하는 시민들의 눈높이가 어떤가 하는 것이다. 인터넷 댓글로 투사되는 반응이나 몇몇의 ‘~할 것 같다’는 인터뷰 정도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들의 근거가 아닌가 한다. 나아가 어떤 경우는 시민들을 볼모로 본질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 같은 인상도 지울 수 없다. 이 작품에서처럼 현대미술에 대한 시민들의 평균적, 또는 보편적 시각을 어떻게 측정하고 이해하고 있을까?

우리가 흔히 전체를 이해하는데 사용하는 방법은 대푯값이나 평균, 중앙값, 최빈값 등을 살펴보는 것이다. 평균에도 한 가지 방법만 있지 않고 몇 가지가 대표적으로 사용된다. 산술평균, 기하평균, 제곱평균, 조화평균. 이 넷은 각각 대상물 저마다의 특성을 충실히 보여줄 수 있는 평균 도출 방법론이자 지표이다. 정량적인 방법론을 정성적 대상물에 직접 대입할 수는 없지만 단순해 보이는 평균 하나에도 숫자(대상)가 가진 본래적 의미를 고려한 적절한 방법론이 의미에 따라 적용된다는 점은 의미 깊게 기억해두어야 한다. 과연 우리시대 작금의 논란에서 저마다의 필자들이 어떤 이해의 실효값(시각, 전체를 보는 방법)을 가지고 논점을 제시하는지 의심하고 따져볼 일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다름이 아니라 시민인 우리 스스로도 각자가 해야 할 일이다.

사실 살펴보면 황지해의 작품들은 늘 이슈를 동반하고 있다. 주제 자체가 그러한 것은 물론이요, 작품과 사회적 반향 사이의 그것도 그러했다. 언젠가 그것이 의도한 활동들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지 않다며 어쩌다보니 그런 작품들을 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 그는 환경미술가, 정원디자이너 이전에 이미 경계를 걷고 있는 예술가인 것이다. 슈즈트리는 그 연장일 뿐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번에도 사회적 이슈가 될 만 했다. 그렇더라도 이번은 조금 달랐다. 생각 같아서는 철거 없이 연장 전시를 통해 논란이 공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작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부수적으로 그를 통해 우리식의 리처드 세라와 그에 부수된 많은 제도의 개선 기회를 가지게 되길 바랬다. 그래도 실망하지는 않는다. 황지해는 여전히 경계를 걸을 것이기 때문에.

* 작품과 관련 분석 텍스트는 최근의 것(2017년 6월 이전)만을 대상으로 단순 전달 형식의 기사는 제외하고, 작성자 또는 인터뷰어의 논점이 담기거나 생각을 그대로 옮기고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글·사진 _ 안명준  ·  조경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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