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산책하는 인간

『걷기의 인문학』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2017)
라펜트l오정학 과장l기사입력2018-05-29
산책하는 인간


_오정학 경기도시공사 과장
(ohjhak@daum.net)


서   명 : 걷기의 인문학(A History of Working)
저   자 : 리베카 솔닛 (김정아 옮김)
펴낸 곳 : 반비(2017)

집 근처의 개천은 한강으로 이어진다. 가끔 나가보면 사람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끊이지 않는다. 성큼성큼 걷는 이들도 있지만 이리저리 바장이거나 운동 삼아 해작거리는 사람도 많다. 다양한 방식의 걷기로 건강을 지키려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여가시간 증가와 노령화가 한 몫 한 듯하다. 국내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이러한 모습들은 의식주에 크게 쫒기지 않는 사회의 공통된 풍경일 것이다. 

‘걷기’는 오늘날엔 아무런 특별할 것도 없는 신체활동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여가활동 혹은 문화적 목적의 걷기를 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생산활동과 무관하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려면 이동의 자유와 함께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당연히 전통사회에서는 소수의 지배층만이 누렸던 권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걷기로 이루어지는 ‘여행’의 역사는 이를 잘 말해준다. 지금은 누구나 여름휴가나 주말여행을 계획하지만 전근대사회에서는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일반인들은 고작 친지방문이나 순례길 정도였고, 그 외의 여행은 유랑 혹은 떠돌이로 인식될 뿐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문화적 걷기’는 일종의 근대적 현상으로까지 볼 수 있다.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은 ‘걷기’의 역사와 문화적 의미를 다룬 비평적 에세이이다. 그는 최근 미국의 가장 핫한 예술평론가이자 문화비평가의 한 사람으로서, 기후변화, 인권, 반전·반핵, 여성주의 등에 많은 진보적 의견을 밝혀왔다. 국내에도 소개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는 남자들의 ‘맨스 플레인(man+explain)’ 증상을 재미있게 비판한 바 있다. 예술과 생태, 도시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걷기의 인문학>과 함께 <텅 빈 도시> <어떤 여행> <황량한 꿈>을 통해서 그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신체활동인 ‘걷기’에 담긴 창조적이고 철학적이며 전복적인 가능성을 조용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조명했다. 

걷기는 바깥활동이다. 따라서 걷기의 역사는 걸을 수 있는 공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크게 보면 도시발달사와 연관되며, 작게는 정원, 가로, 공원 등과 밀접하다. 리베카 솔닛은 “보행을 단순히 수단으로 보는 대신 모종의 의식적 문화 행위로 본다면, 보행의 역사는 불과 몇 세기 전에 유럽에서 시작되었다”고 정의한 뒤 그 기원으로 루소를 내세웠다. 걷기는 바깥에 대한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서구의 기독교문명이 오랫동안 불온시 해왔던 자연에 대한 재평가의 시발점이다. 17세기에 가서야 이태리 자연풍경화에서 보듯이 ‘자연’은 비로소 찬미의 대상이 되었고, 18세기 영국의 풍경식 정원을 통해 인간이 흠모하는 공간이 된다.


도시에서 보기 힘든 이 곡선길은 걷고 싶은 마음을 자연스레 불러일으킨다. 직선의 도시가 창의적인 곡선으로 전유될 때에 인간은 한층 더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lafent

그 뒤 공공공간이 늘어나면서 문화적 ‘걷기’는 인간의 보편적인 외부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걷기’는 여전히 몇 가지 어려움에 가로막혀 있다. 오래된 문젯거리인 ‘치안’의 영향은 여전히 상당수 국가에 남아있다. 특히 성차별이나 인종차별과 결합될 때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데, 적잖은 종교국가와 인종주의 국가, 분쟁지역에서 그 위험성을 종종 느낄 수 있다. 가장 폭넓은 방해요소는 자동차 중심의 ‘도시계획’과 미세먼지· 황사·매연 등의 ‘환경문제’를 들 수 있다. 마스크를 쓴 보행자의 증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근에 지적되고 있는 문제점으로는, 모든 일을 실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 편의를 내세운 온갖 ‘상업공간의 범람’을 들 수 있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적공간을 잠식하는 이 공간들은 신자유주의와 함께 계속 증가추세이다. 중세의 성채를 모방하는 듯한 온갖 게이티드 커뮤니티 공간과 회원제 상업공간들은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그래서 저자는 헬스클럽과 같은 사적공간의 걷기와 공적공간의 걷기를 구분한다. 사적공간에서는 기계적·공장적인 방법으로 신체의 발달을 꾀한다. 매우 효율적이지만 리베카 솔닛은 “헬스장의 개인들이 보는 것은 아마도 유리창 너머의 심연이 아니라 유리창에 비친 자신뿐”이라고 비평한다. 자연속의 걷기가 주는 인문적 사고와는 거리가 먼, 단순히 몸매와 근육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구별 짓기와 나르시시즘에 불과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이처럼 저자는 여러 종류의 걷기 중에서도 자연스럽게 걸으며 주변과 상호작용하는 ‘산책’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신체 활동이라기보다 정신 활동으로서의 효과를 높이 본 듯하다. 이러한 생각은 역사속의 많은 사상가들이 산책을 즐겼다는 점에서 충분히 공감이 간다. 

자연속의 걷기를 즐긴 철학자로는 루소만한 이가 없다고 한다. 고향인 제네바를 떠나 도보 여행을 즐기다가 알프스를 넘어 이태리까지 걸어가기도 했다니 말이다. 그는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내 걸음이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 내 두발이 움직여야 내 머리가 움직인다”고 했다. 그에 비해 발터 벤야민은 도심을 주로 걸었다. 특히 발전 추세에 있었던 파리 도심을 걸으며 산책자들과 쇼핑 아케이드, 이야기꾼, 패션, 세계박람회 등의 시대적 특성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체험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토대로 커나가는 도시를 무심히 바라보지 않고 근대의 표상으로 주목했던 벤야민이었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산책을 통해 작품을 구상하고 풀어나간 이로 유명하다. 글쓰기를 하다가 생각이 막히면 런던의 밤거리를 걸어 다녔는데, 그 거리가 20km 이상일 때가 많았다니 대단한 산책광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산책은 주변의 온갖 것들과 상호작용한다는 점에서 신체활동이라기보다 정신활동의 여지가 많음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은 걷기가 일상화된 시대이다. 걷기는 이제 유사 이래 가장 활발하게 개인의 욕구와 가치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그렇지만 20세기 이후 도시공간의 변화와 함께 또 다른 어려움에 부닥쳤기에, 우리 도시의 형태가 보행자에게 얼마나 친절한 공간인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신체활동인 ‘걷기’가 어떤 이유로든 일상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면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도시공간이라 보기 힘들지 않을까. 도시의 조건과 기능은 여러 가지이지만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도시야말로 가장 좋은 도시일 것이다.
_ 오정학 과장  ·  경기도시공사 사업기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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